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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Sep 08. 2023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영화 <애프터썬> 비평문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그은 피부에 바르는 크림처럼     


  <애프터 썬>은 길지 않고 플롯도 비교적 단순하다. 어느덧 함께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났던 해의 아빠와 비슷한 나이가 된 소피가 자신의 생일날 20여 년 전 캠코더에 기록해둔 튀르키예에서의 나날을 되감는다. 영화는 중간중간 현재 소피의 모습을 아주 짤막하게 덧붙이면서 시종일관 20여 년 전의 순간들을 되살린다. 캠코더에 남은 저화질의 영상과 어른이 된 소피가 떠올리는 과거를 적절하게 오가면서.


  한 시절을 추억하는 플롯에서의 화자는 당연하게도 지금, 살아서 과거를 더듬는 누군가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화자는 소피다. 소피의 아빠인 캘럼이 캠코더를 잡고 찍은 영상의 화자는 캘럼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영상은 너무 짧고, 그마저도 대부분 장면을 차지하는 건 소피다. 소피가 캘럼을 인터뷰한 순간도 있었으나 그때의 소피는 몰랐을 이유로 그 순간은 더 오래 기록되지 못했다. 어쨌든 20여 년 전의 여행을 추억하는 화자는 소피다. 소피는 혼자 시간을 훌쩍 건너 그해의 여름을 재조립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 -사실은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 시절을 함께 지난 건 두 사람인데 추억하는 건 한 사람뿐이라는 한계. 어쩌면 소피가, -내-가 아는 사실은 절반뿐일지도 모른다는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것도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소피는 어떻게 캠코더를 받게 된 것인지, 튀르키예에서 캘럼이 구매했던 카펫이 지금은 왜 소피의 집에 있는지, 여행이 끝나고 캘럼은 어떻게 된 것인지. 장면은 모호하게 처리되지만, 감정만큼은 또렷하게 전달된다. 점멸하는 조명 속에서 몸부림치듯 춤추는 캘럼을 통해서, 그런 캘럼을 바라보는 소피의 시선을 통해서, 노란 조명 아래 앉아 잡지를 읽는 소피와 파란 조명 아래 깁스를 풀다가 팔을 다친 캘럼을 통해서. 그리고, 그때의 소피는 보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의 소피는 상상할 수 있는 새까만 바다를 향해 달리는 캘럼이나 등을 보이고 울음을 터뜨리는 캘럼의 모습을 통해서. 아마 튀르키예 여행이 끝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캘럼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여행이 끝나고 엄마와 사는 집으로 돌아간 소피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고 아마 오랫동안 캘럼이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캘럼과 비슷한 나이가 되고, 동성의 연인이 뺨에 내려주는 키스를 받으며 막 깬 아기의 울음을 들었을 때 소피는 불현듯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은 캘럼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의 다정한 입술에도, 우는 아이에게 가려 몸을 일으킬 때도 소피의 표정은 어쩐지 내내 어두웠으므로.


  진실에 관해서라면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때 어땠어? 라고 질문하며 인터뷰 놀이를 할 사람은 이제 없고, 모든 질문과 답변은 소피 혼자 찾아내야 한다. 물론, 설사 찾아낸다고 해도 두 명 몫의 문답을 혼자 해낸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것은 팔이 닿지 않는 등에 썬크림을 골고루 펴 발라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빨갛게 익은 등에 진정 크림을 발라주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캘럼을 향해 손을 흔드는 어린 소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캠코더의 영상은 끝이 나지만, 소피는 그 뒤에 영상을 덧붙인다. 캠코더를 든 손을 내리고 점멸하는 조명이 어지러운 어둠으로 들어가는 캘럼. 그가 들어가자 닫히는 문. 소피는 결국 캘럼을 전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이틀이 지나면 131살이 되는 130살 캘럼도 소피의 ‘11살 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듯이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끝내 알 수 없는 것들은 이렇게나 많다. 소피는 그저 몇 가지 단서로 끊임없이 그때의 자신은 미처 몰랐던 캘럼의 어떤 모습들을 기워보려 노력할 것이다. 11살 생일에 생일이라고 엄마에게 말했다가 혼이 난 캘럼. 한 번도 고향에서 소속감을 느껴본 적 없다던 캘럼. 매년 같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하던 캘럼. 어느 밤 먼저 호텔 방에 들어가더니 잠이 들어 방문을 열어주지 않던 캘럼. 어떤 것도 캘럼의 전부를 설명해주지는 못할 테지만. 소피는 그것들을 잘 그러모아 몇 차례 주물럭거릴지도 모른다. 손에 힘을 꽉 주고. 그러나 우리는 안다. 같이 투어를 떠난 사람들에게 아빠의 생일이라고 알리며 하나, 둘, 셋을 외치면 같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소피의 표정과 딸과 낯선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생일 노래를 듣는 캘럼의 표정의 대비되는 표정이 알려주는 하나의 진실을. 우리는, 그러니까 소피는 영원히 저 표정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리라는 것을.




Pressure pushing down on me    



  <애프터 썬>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건 그렇게 영영 알 수 없음의 세계로 건너간 캘럼의 마음 언저리를 모호하게 맴돌면서도 사랑만은 또렷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캘럼은 소피의 양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호신술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건 중요해 소피. 반드시 배워야 해. 그래야 널 지킬 수 있어. 누군가 너를 공격하더라도 호신술을 알면 도망칠 수 있어.”


  어떤 어려움이나 공격 앞에서도 순간적인 힘으로 유연하게 빠져나오길 바라는 마음. 담배는 위험하니 절대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자신도 이미 다 해본 일이니 클럽에 가거나 약을 하거나 하면 꼭 자신에게 말하라고 하는 다정함. 다친 팔로도 소피의 몸에 선크림을 펴 발라주고, 소피에게 큰 침대를 주고 자신은 작은 침대에서 자는, 사랑이거나 사랑에 가까울 몸짓들.


  영화의 후반부에 흐르는 퀸의 음악, under pressure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love dares you to care for The people on the edge of the night.’(사랑은 네가 밤의 모서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게 해.) 확실히 그렇다. 조금 긴 시간이 걸렸지만, 소피는 지금 캘럼이 보내야 했던 밤의 모서리를 들여다보려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행위는 캘럼의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결되지 못한 사랑이 소피에게 궁금증을 놓지 않을 힘을 주었을 테니까. 위의 가사 다음에 나오는 가사는 이렇다.‘And love dares you to change our way of Caring about ourselves’(그리고 사랑은 우리 자신을 돌보는 방식을 바꾸게 하지.) 캘럼을 생각한다면 이 가사는 틀렸다. 캘럼은 소피를 사랑했지만, 끝내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보이므로. (죽음이 자신을 돌보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는 점은 잠시 차치하기로 하자.) 

  그렇다면, 사랑은 무용한 것일까. 사랑으로 누군가의 밤을 들여다보려 하지만, 그 밤은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고,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도 바꾸는 데 실패한다면 사랑의 역할은 무엇인가. 




This is our last dance     


  이쯤에서 소설가 김연수의 작품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쓰인 작가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이해하고 싶어 애를 쓰고 알고 싶어 자꾸만 더듬고, 그러다 넘어지고 실패하면서도 끝끝내 놓지 않는 것. 사랑이란 어쩌면 그 모든 과정일지도 모른다. 소피는 지금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때는 몰랐던 캘럼의 모습을 영상 속에 덧붙이면서. 소피가 덧붙이는 캘럼의 모습은 전부 우울하고 불안하다. 울고 있거나 어둠을 향해 뛰고 있다. 그것이 진실이었을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계속 그리는 것이다. 사랑받았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캘럼은 없지만, 소피는 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아이도 있다. 새로운 사랑과 책임 앞에서 캘럼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 건 슬픈 일일까 기쁜 일일까. 성장일까 체념일까. 그마저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피는 계속해서 춤을 출 것이다. 때로는 캘럼과 함께. 캘럼의 손을 잡은 소피는 영원히 한 방향으로만 춤을 추겠지. 춤은 멈추지 않겠지만, 그것은 반복일 뿐이고 다시는 새로운 춤을 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춤을 춘다는 것.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사랑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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