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차이도 있었고요... 특히 경제적인 생각이 서로 달랐어요.. 그 사람은 ”오늘“이 중요하고 나는 ”내일“이 중요했습니다..... 특히 다른 여자도 좋다고 하고.....”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하며 나의 이혼을 정당화시키는 설득을 '참 자세히'도 했다. 왜냐하면 나의 수치심이 들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요즘 매 맞고 사는 사람이 어딨냐"라고 묻겠지만, 이런 질문이 나를 “쪽팔리게 만든다.” 수치를 넘어 “쪽팔린다”는 저렴한? 용어가 그때 나의 감정을 설명할 가장 가까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임신해서 배가 어엿 부른 나를 남편이 “걸레봉”으로 때리던 날이었다.
그날 나는 집들이 온 친정 부모님에게 웃으며 아무 일 없었던 척을 했었다. 나의 결혼을 반대했던 친정부모님에게 차마 그 “꼴”을 이야기할 수 없었으므로....... 그래야 '그 사람 믿고 결혼하겠다'라고 우겼던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거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애 낳고 일주일 만에 눈에 멍이 시퍼렇게 든 나를 보고 시아버지가 “왜 그렇냐”라고 물었을 때 “대들어서 이래 됐다”라고 말하며, 내가 가해자가 되지, 수치스러운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약해서, 부족해서 매 맞았다"라고 인정하기 싫었다.
가정폭력에 물든 결혼생활의 시간들은 나에게 수치심의 감정을 주었고 이어서 “나는 열등한 존재라 맞고 사나 보다” 하는 “학습된 무기력”의 상태로 있었다. 17년 동안 , tv뉴스에서 조차 “가정폭력” “매 맞고 사는 아내”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채널을 급하게 돌렸다. 남편이 옆에 있을 때는 “더 빨리.... 더 아무렇지 않은 듯...”
'남편의 폭력'은 내가 아이를 때리는 가해자로 만들었다.
폭력의 내면화는 독처럼 번져나갔다.
아빠의 행동을 모방하는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나를 마구 주먹질하고 밟으며
“엄마 씨 팔 년”이란 말을 집에서곤, 거리에서곤 마구 뱉을 때였다.
남편은 “아들에게는 힘으로 이겨야 해. 남자들은 다 그래, 한번 꺾어놔야 된다고”라고 말했고
나는 아들에게 힘으로 이겨 볼 심산으로 단단히 무장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아이가 내 뒤로 달려와 내 머리채를 쥐고 “씨 팔 년”을 외치 던 날
나는 아이를 집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 “매질”을 했다. 같이 때리고 맞고 싸우는 '치욕'스럽기 까지 한 모자간의 육탄전이었다.
불과 초등학교 4학년 아이였지만, 나의 힘은 아이를 이겨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온 힘을 다해 가해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