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과정은 갈등의 연속선상에 있다. 갈등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무덤 속에서나 가능할 법 한 일일 것이다.
갈등은 걱정을 동반하고 불러일으키는데, 이 걱정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참 공평한 것 같다.
걱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 나 있기 때문이다.
걱정의 크기와 양은 밖에서 보기에 그 경중을 저울질할 수 있겠지만, 실제 그것을 앓고 있는 이는 그저 괴로울 뿐이다.
이 괴로움에는 '총량'이 존재하는데, 나의 경우는 큰 걱정이 없으면 작은 걱정을 모아 만들어서라도 그 총량을 채워놓고 사는 것 같다.
물론 큰 걱정이 있을 때는 작은 고민이나 소소한 문제는 잠시 잊어두거나, 미뤄둔다.
그래서 총량은 항상 같다.
이쯤 되면 질문하나 가 떠오른다. 더 잘 사는 사람이나 무엇인가를 해낸 사람은 이 걱정의 총량이 작지 않을까?라는..
내가 먹고사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한 만큼, 가진 자들도 그들의 위치에서 걱정과 불안의 연속선상에서 산다는 것은 같은 것 같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걱정 없이 평온하다면, 최소한 우리가 접하는 뉴스 기사의 비보들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실제로 나의 주변만 보더라도 남 보기에 부러워할 만한 삶의 질을 가진 이들도, 깊게 들여다 보면 걱정의 한숨이 있고, 갈등이 늘 존재하고 있는것 같다.
걱정의 종류가 다를뿐이다.
오늘도 걱정을 하며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갈등을 안고 하루를 살아가는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것은 지금 내가 살아있는 증거라고..
ps. "퍼펙트 클리어한 삶"은 없다. 다들 뱃속에 조금의 똥을 넣어 놓고 살 듯, 우리는 그렇게 자기총량대로의걱정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없어지는 날은 아마도 무덤으로 가기 전 '잔변'이 모두 나올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