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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영 Oct 31. 2021

독백의 시간

이인영, <보낼 수 없는 편지>, 종이에 수채, 19.5x28.5cm, 2021.10.



나이가 들수록 그때 그 순간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이 마음속에 쌓여간다. 그 말들엔 미안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 증오하는 마음, 부끄러운 마음... 다양한 마음이 담겨 있다. 응어리를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시간 속에 묻어버린 관계들이 남긴 잔재이다.


바쁜 현실 속에 있을 때는 이 잔재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에 필요치 않은 정보들, ‘나’의 존재를 합리화시킬 수 없는 기억들은 뇌가 알아서 편집해 망각의 강물 속으로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때로는 자기기만적이지만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엄청난 양의 기억의 무게에 짓눌려 침대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시간의 공백이 생길 때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 기억들이 내 편집 의도와는 무관하게  하나둘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럴 때 더 깊숙하게, 더 오랫동안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서운했던 기억, 상처받았던 기억보다 나의 미성숙했던 언행과 실수, 후회스러운 선택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 기억 조각들이 일단 떠오르고 나면 마음에 작은 파동이 일고 결국 커다란 파도가 된다.


자신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의 존재인지, 내가 싫어했던 이들의 가장 혐오했던 그 부분이 내 안에도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지 알게 되면, '나'라는 존재를 유지시켜 주는 힘이 합리적인 논리나 견고한 의지가 아니라 거대한 망각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내가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말, 혹은 누군가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해야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를 받은 만큼 상처를 준 적도 있다는 것, 나 역시 모순으로 점철된 존재임을 되새기면서 이제는 그만 내 안에 쌓여있는 서운함들을 날려 보내자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앞으로는 좀 더 선명하고도 다정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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