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순간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이 내 안에 많이 쌓여있다. 그 말들 속엔 해명하고 싶은 마음, 사과하고 싶은 마음, 따지고 싶은 마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 시간의 모래에 덮인 기억들이 끝내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잔해로 남아 있는 것이다.
바쁠 때는 이 잔해들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 지금의 나의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데 방해가 되는 정보들은 뇌가 알아서 걸러내 망각의 영역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비합리적이고 때로는 자기기만적이지만 당장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한가할 때면, 진득하게 정신을 집중할 만한 마땅한 일이 없을 때면 내면 어딘가에서 솔솔 바람이 불어와 잠들어 있던 잔해들을 흔들어 깨운다. 그중 지금의 상황과 어떤 알 수 없는 각도로 가장 밀접하게 닿아 있는 특정 기억이 단숨에 일어나 현재를 점령해 버린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때의 그 미숙한 나로 돌아가 버린다. 그때로부터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아직도 그 기억에 이토록 흔들리는 자신의 나약한 정신에 절망한다.
그런데 이럴 때 나를 더 심하게 흔들고, 더 아프게 찌르는 것은 서운했던 기억, 상처받았던 기억보다 나의 미성숙했던 언행으로 인해 타인이 받았을 상처에 대한 기억들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기억들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은 수많은 아픔들이 예전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종류의 고통을 발견하게 하고, 또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감정도 더 절절하게 느끼도록 내 감성의 결을 확연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인 것 같다.
다정하게 받아주지 못한 사과, 애정에서 나온 응원의 말이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선을 넘는 표현으로 느껴졌을 발언들, 내 작업과 고민에 집중하느라 주변인들의 감정에 무심했던 나날들... 내가 타인으로 인해 경험했던 종류의 외로움과 민망함, 아픔을 타인이 나로 인해 느꼈을 거라 생각하니 무거운 돌이 거울에 떨어지듯 미안함이 마음 한가운데를 타격한다. 깨진 마음은 돌에 계속 갈리고 짓눌린다.
기억들의 돌연한 습격 속에서 새삼 망각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나'라는 존재가 의지나 욕망, 논리보다 망각의 기능에 절대적으로 의지해 유지되고 있음을, 망각이라는 거대한 모래사막이 있기에 그 위에 의지와 논리의 탑을 쌓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추한 부분을 계속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견고한 의지의 탑을 쌓을 수가 없다. 망각의 지면 아래 있는 것들이 잠자코 가만히 있어야 탑이 흔들리지 않는다. 문득 내가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말, 혹은 누군가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 어쩌면 내가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해야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 기억들을 다시 묻자고 다짐한다. 예전처럼 바빠서 무심코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곱씹으면서 묻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기억들이 모래 속에서 완전히 분해되어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자양분이 되어주길 희망한다.
지금의 내게 있어 ‘더 나은 인간’이란 자기 색이 분명하고, 감정을(혹은 상상력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상처를 받았든 상처를 주었든, 내가 갖고 있는 응어리의 대부분은 분명하지 못했던 나의 태도와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타인의 낙담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바람에 생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