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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영 Sep 18. 2022

이인영, <숨을 곳>, 종이에 수채, 21x30cm, 2022.5.



직장 근처에 나는 늘 숨을 곳을 마련해 놓았다. 그 공간들은 내게 게임 바깥의 영역,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영역이었고, 안에서 나는 하루종일 나를 뒤쫓던 어떤 정체불명의 술래로부터 잠시 벗어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짧게 짧게 끊어진 사회생활이었지만 그 은신처들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은신처들은 오히려 술래가 마련해 놓은 함정이었던 것 같다. 덫 안의 달콤한 미끼처럼  술래의 세상 속으로 상대를 더 깊숙이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 나는 그 은신처들이 좋아져서 오히려 더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고 귀엽고 세련된 것들로 가득했던 그 오렌지빛 공간들. 그 속에서의 불안정한 안도감, 제한된 해방감, 소소하고 은근한 즐거움. 이상하게도 방금 전까지 속해있던 무미건조하고 치열한 일상 세계가 그 안에서 유리창 한 겹을 앞에 두고 바라보면 그렇게 반짝여 보일 수가 없었다. 은신처는 잠시 숨는 곳이지 진정한 안식처가 아닌데, 나는 그 은신처에서의 안락함과 즐거움에 너무 도취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혹시 나는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든다. 내가 만들어낸 은신처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 어둡고 축축한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잠시 숨는 곳을 영원한 안식처로 착각하고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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