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던 어느 퇴근길이었다. 아, 우울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묘하게 그 기분이 조금 가짜처럼 느껴졌다. 그건 내가 우울한 기분으로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그림 속 풍경처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풍경이 그림으로 그릴만한 소재일까, 이 기분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면서 자신의 우울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는 이 기분이 유지돼야 하는데,라는 이상한 걱정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내포하고 있는 함정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애착이 지나쳐 그것을 액자 속에 박제해 놓고는, 그 액자 속 감정에 (이미 변한) 자신의 감정을 다시 끼워 맞추는, 그런 인위적인 감정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는 함정.
내가 자꾸 자신의 우울함을 감상하는 건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거리를 두어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무덤덤하게 혹은 즐겁게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그 행위를 연극적이라고, 지나친 자아도취라고 무조건 폄하하거나 억제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우울을 대하는 태도
젊을 때는 우울이라는 감정 덕분에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훨씬 성격이 밝고 산만했던 그 시절엔 몸과 마음이 자꾸만 바깥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따금 찾아오는 우울이 그런 기세를 가라앉히고 집에 틀어박혀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한 적도 있다. 만약 이 우울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을 만큼 내 삶이 즐거워지면 혹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지금은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냉소적이고 침체된 기분이 일상이 된 요즘, 나는 그림 앞에 내 몸을 끌어다 놓기 위해, 손에 얇은 세필 붓 하나를 쥐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내 안에서 밝은 기분을 쥐어 짜낸다. 축축한 습기와 안개로 가득한 음울한 숲속에서 불씨 하나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일이 눈뜨자마자 내 마음속에서 벌이는 일이다.
그림이 그려질 정도의 우울은 우울이 아니었다. 아니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건 우울의 본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림을 그리게 하는 우울이란 수백, 수천 살 먹은 고목이 더운 여름날 아이들을 자기 곁에 끌어들이기 위해 드리운 시원한 그늘 같은 것이었다. 겉보기엔 운치 있고 웅장하지만 속은 이미 심각하게 썩어있는 나무. 그 그늘 속에 오래 머무는 동안 나무가 품고 있던 쇠멸의 기운이 내게도 옮아 붙은 것 같다. 어느새 그늘은 겨울밤 하늘처럼 깊고 어두워졌다.
요즘의 나는 이 유령 같은 나무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우울의 가지들을 쳐내고 그늘 밖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고 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우울이 아니라 열정이다. 이 우울의 고목을 태워버릴 불이다. 우울을 낭만적으로 대하기엔 지금 내 안에 밝음이 너무도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