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울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묘하게 이 기분이 조금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그건 내가 우울한 기분으로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그림 속 풍경처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풍경이 그림으로 그릴만한 소재일까, 이 기분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면서 자신의 우울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는이 기분이 유지돼야 하는데,라는 이상한 걱정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내포하고 있는 함정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애착이 지나쳐 그것을 액자 속에 박제해 놓고는, 그 액자 속 감정에 (이미 변한) 자신의 감정을 다시 끼워 맞추는, 그런 가식적인 감정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는 함정.
내가 자꾸 자신의 우울함을 감상하는 건 그럴만한 심적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거리를 두어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무덤덤하게 혹은 즐겁게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그 행위를 연극적이라고, 지나친 자아도취라고 무조건 폄하하거나 억제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동네 카페에 나와 있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내려서 낮인데도 창밖 풍경이 온통 잿빛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두 여인. 40대 중후반쯤으로 보인다. 얼핏 들리는 말.
"너무 우울해요, 일도 너무 힘들고... 집에 가도... 정말 혼자만의 시간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다가 벅차오르는 듯 말을 잇지 못한다. 울음소리가 카페의 적막을 뚫고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