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너머 저곳에 환상의 세계가 있다. 저 환상의 세계가 궁금해서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바깥과 다름없는 무미건조한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을 자각할 때쯤이면 커튼 바깥세상이 거꾸로환상이 된다. 새로운 환상을 좇아 다시 커튼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면 역시나 그곳은 현실이고 커튼 너머로는 또 다른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환상은 언제나 우리 앞에 드리워진 커튼 너머 저곳에 있다. 우리가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는 건 그 환상이 현실로 변해가는 잠깐의 시간 동안뿐이다.
몇 달 전, 업무인계를 마치면서 나는 또 한 번 커튼을 열고 새로운 환상의 세계로 들어왔다. 지난 세월 도대체 몇 번을 커튼 이쪽저쪽으로 넘나들었는지. 나는 현실의 권태와 치열함을 좀처럼 견디지 못하고 툭하면 현실세계를 뛰쳐나왔다. 늘 저곳에 있는 아름다운 환상만을 삶의 이유와 동력으로 삼았다.
이제 예상했던 대로 환상은 현실로 변해가고 있다. 신비의 안개가 하루하루 옅어지면서 환상은 평범하고 명확하고 구체적인 일상으로 안착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이 현실 세계에 끈기 있게 있을 생각이다.
내가 잡을 수 있는 진정한 환상은 오직 이 권태롭고 치열한 현실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은 타인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어 있는, 저 멀리 있는 화려한 세계가 아니라 이 무미건조한 현실을 재료로 하여 내가 만들어 내는 그 무엇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작고 소소한 환상을 계속 쌓아가다 보면 내가 있는 이 현실이 어느새 커튼 너머 저곳의 환상의 세계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