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짧은 이야기로 엮을 수 있을 정도로 지나온 시간이 축적되면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어느 정도 타인처럼 볼 수 있게 된다. 완전한 타인은 아니지만, 지금의 나와 동일시하기에는 이제 낯선,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점점 멀어지는 다른 나뭇가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과거의 자신을 타인처럼 인식하게 되는 시점부터 이제 인생은 저 환영적 존재와의 기나긴 동행 혹은 싸움의 시간이다. 인생의 행복은 저것과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려 있다. 너무 가까워져서도 너무 멀어져서도 안되고, 완전히 압도당해서도 압도해서도 안된다. 압도당해 버리면 과거라는 환영의 안개에 갇혀 늘 무겁고 몽롱한 마음으로 살게 되고, 지나치게 압도하면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고유한 지반, 나를 지탱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버팀목,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 나만의 갈망도 잃어버리게 된다. 실체 없는 저 환영 속에 나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알고자 하는 작업을 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저쪽의 나에게 이쪽에서 먼저 바짝 다가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의 시원을 찾아 과거 속 과거로 끝없이 파고들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시간의 선후관계가 뒤엉키고 현실감각이 심각하게 무뎌져 인생 전체가 완전히 과거의 강물 속으로 침몰해 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작업을 굳이 왜 하는 걸까? 앞으로의 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서이다. 알 수 없는 힘에(그것이 나의 무의식이든 타인의 의지든 사회 시스템이든) 끌려다니듯 살지 않고 내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하면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환영 속에 있는 나의 핵심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혼동하지 말자. 이 작업을 하는 건 유치한 자기 연민이나 자기 합리화, 자기혐오의 둥지에 안착하기 위함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오류를 파악하여 흔들리지 않을 강한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은 생을 과거의 나와 평화롭게, 그러나 내가 확실한 주도권을 갖고서 동행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