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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영 Sep 22. 2023

저쪽의 나

이인영, <저쪽의 나>, 종이에 수채, 15x21cm, 2023.9.



하나의 짧은 이야기로 엮을 수 있을 정도로 지나온 시간이 축적되면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어느 정도 타인처럼 볼 수 있게 된다. 완전한 타인은 아니지만, 지금의 나와 동일시하기에는 이제 낯선,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점점 멀어지는 다른 나뭇가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혹은 오래전에 죽어서 이미 잘라내 버린 나뭇가지의 환영)


과거의 자신을 타인처럼 인식하게 되는 시점부터 이제 인생은  환영적 존재와의 기나긴 동행 혹은 싸움의 시간이다. 인생의 행복은 저것과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려 있다. 너무 가까워져서도 너무 멀어져서도 안되고, 완전히 압도당해서도 압도해서도 안된다. 압도당해 버리면 과거라는 환영의 안개에 갇혀 늘 무겁고 몽롱한 마음으로 살게 되고, 지나치게 압도하면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고유한 지반, 나를 지탱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버팀목,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 나만의 갈망도 잃어버리게 된다. 실체 없는 저 환영 속에 나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알고자 하는 작업을 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저쪽의 나에게 이쪽에서 먼저 바짝 다가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의 시원을 찾아 과거 속 과거로 끝없이 파고들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시간의 선후뒤엉키현실감각이 심각하게 무뎌져 인생 전체가 완전히 과거의 강물 속으로 침몰해 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작업을 굳이 왜 하는 걸까? 앞으로의 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서이다. 알 수 없는 힘에(그것이 나의 무의식이든 타인의 의지든 사회 시스템이든) 끌려다니듯 살지 않고 내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하면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환영 속에 있는 나의 핵심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혼동하지 말자. 이 작업을 하는 건 유치한 자기 연민이나 자기 합리화, 자기혐오의 둥지에 안착하기 위함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오류를 파악하여 흔들리지 않을 강한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은 생을 과거의 나와 평화롭게, 그러나 내가 확실한 주도권을 갖고서 동행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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