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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함'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by 이인영
이인영, <연극 사회>, 종이에 수채, 19.7x15.5cm, 2024.5.



4월도 다 갔다. 거리에 내려앉은 하얀 뭉게구름 같았던 벚꽃들도 모두 사라졌다. 원래는 봄까지 작업을 다 마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런 속도라면 빨라도 6월 말쯤은 되어야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6월까지 그림을 그리고, 그 후에 내가 모르는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그림집이라는 것을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 작업에 거의 5년을 소요하는 셈이 된다. 5년 동안 그린 서른여 점의 작은 그림들. 이 그림들이 그 지난하고 치열했던 나의 방황의 시간을 충분히 대변해 줄 수 있을까? 빈약해 보이지 않을까? 자신이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애초에 그림집을 만들고 싶어 했을까? 이 작업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써버린 것에 대해, 그로 인해 놓쳐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 왜 어쩔 수 없지,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킬까? 이것이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사실 이 목표의 설정엔 그리기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엔 '그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증명하고 싶은 욕심도 작용하고 있었다. 아니 후자가 더 컸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표명하고 싶다, 좋아하는 마음을 사회에서 공인받고 싶다,라는 인정 욕구가 나의 시선을 이 표지에 오랫동안 고정시켰다.


그 욕망 속엔 어떤 응어리도 섞여 있었다.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위치 지우지 못했을 때 생긴 응어리. 세상에서 정말 답답하고 억울한 일은 어떤 대상을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 가장 화가 나는 일은 좋아하지도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 대상을 중요시하는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일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분노한 적이 있다. 그 분노의 불꽃이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어서 이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있다'라는 사실은 그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는 누군가를 더 깊이 알고자 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삶을 동경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찾아본다. 그가 애정을 쏟는 대상이 그 사람의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마음이 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 속에 그 대상이 이미 있음을 뜻하기도 하고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대상이 이미 그 사람 안에 있다고 해서 그것은 더 이상의 추가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반대로 결핍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결핍된 상태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이미 대상의 완벽한 상태를 자기 안에 갖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외부로부터 그것을 보탤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대상이 완전히 결핍되어 있다면, 애초에 그것에 대한 끌림 자체를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완전히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그것이 들어설 자리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좋아한다', '끌린다', '갖고 싶다'라는 감정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그 대상이 깃들 자리가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생긴다. 그 빈자리는 다른 대상은 앉을 수 없는 맞춤형 의자이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그 대상이 '완전한 있음'과 '완전한 없음'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대상을 계속해서 좋아하고 따름으로써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그 대상을 완전한 있음의 상태가 될 때까지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좋아하는 마음의 표명과 그 좋아하는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동일하게 보는 사고방식이 만연한 것 같다. 강하게 표명하는 만큼 오히려 그것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잘 하지 않는다. 애정을 받는 대상의 이미지를 그 사람에게 그대로 덧씌워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보여주기식 취미에 열중하고, 어떤 때는 좋아하는 행위 자체보다 그 좋아함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더 신경 쓰기도 한다. 물론 '보여주기'에 치중한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좋아할 줄도 알고, 그것을 보여줄 줄도 아는 사람은 오히려 능력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정이 안 가는 부류는 진심으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함'을 연기하는 사람들이다. '좋아함'을 연기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타인이 일방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행위는 미묘하게 감지가 된다. 마치 맞지 않는 가면을 끈으로 억지로 얼굴에 동여매고 있는 사람의 과도한 자연스러움의 연기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혹은 틈만 나면 자리를 박차고 떠나려고 하는 손님을 못 나가게 감시하고 있는 듯한 긴장감 같은 것이 그 행위에서 느껴진다. '좋아함'을 연기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그 대상이 깃들 보금자리를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탐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는데, 사회의 시선, 혹은 타인이 알 수 없는 어떤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엉뚱한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진심이든 연기든, 아니면 그 사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어쨌든 지금 우리는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모든 행위의 기준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무언가를 진지하게 좋아할 줄 아는 능력보다(나는 이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시각적으로 그 마음을 노출시킬 줄 아는 능력이 훨씬 중요하다. 좋아하는데 그걸 증명할 능력이 없다는 건 거의 형벌이다. 그런 사람은 정체 모를 누군가가 내가 써야 할 가면을 훔쳐간 듯한 억울함 속에서 살게 된다.






남은 그림들이 등에 진 무거운 돌처럼 느껴진다. 혹은 나를 꽁꽁 에워싸고 있는 껍질들 같다. 여름쯤엔 이 껍질을 깨고 나갈 수 있을까? 올해 중에는 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까? 나도 좋아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능력을 갖게 될까?

'그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사회에 표명하고 싶다는 갈망.

이 갈망 속엔 다분히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허영심이 섞여 있지만, 적어도 '좋아함' 자체가 거짓은 아니다. 나의 갈망의 가치를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내 안에 그림이 앉을 빈자리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 의자는 수십 년 전부터 내 마음속에 존재해 온 오래된 고가구이다. 나는 의자에 엉뚱한 것을 앉히려고 하는 게 아니다. 6월까지는 그림을 끝내자. 그리고 야무지게 내 가면을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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