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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정화

by 이인영
이인영, <정화의 시간>, 종이에 수채, 21x30cm, 2022.1.



내가 가진 단어들 중 몇 개는 아주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이다. 학생 때만 해도 나는 그 단어들을 꽤 좋아했었고, 그 안에 담긴 덕성을 진정으로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기도 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 여러 인간관계를 경험하면서, 특히 언어를 서열화의 도구로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들을 거치면서 그 말들에 대한 내 감정의 온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그 그림자만 얼핏 보여도, 혹은 비슷한 발음이나 의미를 지닌 단어가 귓가를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벌레가 닿은 것처럼 흠칫 놀라곤 한다. 그것들은 마치 일상 곳곳에 놓인 덫과 같아서, 어쩌다 밟으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의 그물망을 머리 위로 덮어 씌운다. 덫 안에서 나는 세상을 예전의 적들과 동일시하며 경계와 증오의 눈빛을 마구 발산한다. 그 말을 또 무방비 상태에서 들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다.


이런 언어의 덫을 내 일상에 흩뿌려 놓고 간 이들, 내가 그 단어들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만든 이들에 대한 미움이 나이가 들어도 쉽사리 사그라들지가 않는다. 무엇보다 슬프고 억울한 건 그들이 그 단어를 내게 사용했을 때의 의도가 어느 정도는 실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내가 그들이 씌운 프레임에 맞춰서 상당히 변해버렸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단어들을 평생 피하면서 살아야 할까? 그 단어들을 다시 원래의 순수한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을까? 그들이 내게 씌운 언어의 올가미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까? 그건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혼자 화내고 체념하고 삭이는 방법으로는 조금 무덤덤해지거나 한동안 망각할 수는 있어도 그 단어들과 나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


새로운 사건들이 필요하다. 그 단어들을 오염시킨 것만큼이나 강력한 정화 효과를 지닌 사건들. 비뚤어진 인간관과 단순한 직관력, 비열한 공격성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아닌 편견 없는 시선과 다정함, 진솔하고도 담백한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이들과의 사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연 내 앞에 그런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미 그 단어들은 정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는 건 아닐까? 혹시 나는 그 단어들의 검은 프레임 속에서 이미 너무 심하게 비뚤어져 버려서, 그런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든 인격이 건 아닐까? 정화는 이룰 수 없는 판타지일까?


그렇다 해도, 나는 그 판타지를 계속 품은 채 살고 싶다. 언젠가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리라, 그들이 내게 씌워진 언어의 검은 그물망을 거둬내고, 그 단어들의 순수한 본래 의미를 되찾아 줄 것이라 믿는다.


내가 그 단어들을 영영 쓸 수 없게 되는 것, 그 의미에서 멀어진 인격이 되어 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과거의 적들이 바라는 일이다. 내가 그 의미를 되찾고, 그것을 실천했을 때 나를 얕보지 않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바라지 않는 일이다. 나는 그 단어들을 다시 좋아하고 싶다. 그 의미를 진심으로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화의 판타지를 포기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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