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무심히 마음을 놓고 있다가 이런 교묘한 공격적 화법에 노출되는 순간이 있다. 타인의 허점을 염려라는 부드러운 헝겊으로 감싼 가시로 찔러 순식간에 흉터로 만드는 말들, 그리고 그 흉터를 지닌 사람을 더없이 가여운 존재로 못 박아버리는 말들. 이럴 때의 염려는 위장일 뿐, 그 속에 담긴 진심은 타인의 불행을 자기 슬픔에 대한 위안거리로 삼으려는 가학적인 욕망이다. 사실 그가 타인의 허점이나 불행이라 여긴 것조차, 실제로는 허점도 불행도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차라리 직설적인 증오나 무시의 표현은 그 의도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어 대응하기도 간단한데, 걱정과 격려를 가장한 이런 식의 우회적인 공격은 그 본의를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고, 알아차렸을 때 대응하기도 애매하고, 무엇보다 상대를 비난하기에 앞서 불쾌함을 느낀 자신의 인성을 먼저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더 악질적이다.
모든 연민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가짜 연민, 즉 선의를 가장한 공격이다. 상대가 마주하고 있는 사소한 문제 하나를 바탕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 속의 가장 초라한 인물을 끌어와 그 이미지를 그에게 덧씌우는 것, 상대의 약점을 일부러 계속 상기시킴으로써 그가 그 약점을 극복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 상대가 지닌 다양한 성질 중 가장 못나고 추한 부분을 엄청나게 부풀려, 마치 그것이 그의 본질인 양 떠들어대는 것, 이런 종류의 행위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건 자기 삶의 우울이나 권태를 '연민'이라는 놀이를 통해 달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교묘한 공격적 화법을 쓰는 사람들 중에 유독 상대하기 힘든 부류가 있다. 바로 자신의 위선을 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 자신의 염려가 우회적인 공격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대개 그 괴리적 언행에 대한 꺼림칙함 때문에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출 줄 알고, 또 간혹 미안해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말이 진실로 이타적인 것이라 믿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때문에 멈추질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 안의 악심을 인지하지 못하므로, 상대가 거의 인격 파탄의 지경에 이를 때까지 그 가식적 화법을 고수한다.
상대가 받아들이기에는 분명 위선인데 그 행위의 주체는 그것이 선이라고 믿고 있을 경우, 그 행위는 선으로 봐야 할까, 위선으로 봐야 할까? 그들은 정말 자기 안의 악의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까?
이런 사람의 언행이 불쾌하다고 해서 자칫 어설프게 반격했다가는 상대의 선한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나는 오래전에 나에게 이런 교묘한 공격적 화법을 반복적으로 썼던 동료에게 시간을 내어 솔직하게 나의 불쾌함을 토로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후폭풍을 맞은 적이 있다. 상대는 자신의 행동이 선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솔직한 항의 표현에 오히려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여겼고(나는 이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급기야 은근한 앙심을 품게 된 것이다. 그 후 몇 년 동안 내가 겪은 곤란은 다시 상기하고 싶지도 않다.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자기 안의 악을 인정하지 않는 신념의 소유자와는 싸우기보다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삶의 지혜이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서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 것인지 요즘 들어 그런 가짜 연민의 화법이 자주 들린다. 그것을 감지하고 나면 극도로 정신이 피곤해져서 빨리 집에 들어오고 싶어진다. 반격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는다. 가짜 연민으로 상대를 자기보다 가여운 존재로 만듦으로써 얻는 순간적인 쾌감이 뭐 그리 좋을까? 이런 종류의 자잘한 기싸움이 나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2023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