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타인에 대한 환상
이인영, <창>, 종이에 수채, 15.5x17.5cm, 2025.7.사람에게 너무 큰 환상을 드리우는 것이 나의 오랜 병이었다. 젊은 시절 타인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내가 지녔던 환상은 확실히 남들의 그것보다 훨씬 비현실적이고 진지했다. 특히 나는 친구나 동료와의 관계에 대한 남다른 이상을 품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학창 시절에 접한 전근대시기의 각종 장인 공동체에 대한 신비로운 이미지가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 혹은 동료와의 관계에서 나는 그들이 원한 적도 없는 환상을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아니 우리에게 씌우고, 그 환상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서운해했다. 사실 나부터가 그 이미지 속 인물이 되기에는 자질이 한참 부족했는데, 젊을 때는 그런 나의 모습에 대해서는 서운함을 느낄 줄 몰랐다. 상대의 개성을 무시한 채 무턱대고 나의 이상을 덮어씌운 것, 이것이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어그러진 이유였다. 나는 이 병을 서른다섯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내가 품고 있는 것 정도의 관계에 대한 이상은 누구나 갖고 있는 줄 알았다.
최근 나는 이 환상의 창들을 하나둘 버리고 있다.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관찰하고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사고 현상이다. 이제껏 나에 대해 갖고 있던 과도한 기대감을 버리면서, 나라고 믿어왔던 것들의 대부분이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타인에 대한 나의 판단 또한 그들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미지가 그 사람의 본질과 일부분 닿아 있을 수는 있어도 본질 그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개인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시기별로 나 자신에게 드리우는 환상이 그때그때 나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환상과는 별개로 내 안에는 '나'라는 것이 따로 존재할까. 내가 시기에 따라 끌어다 쓰는 다양한 환상들 간에는 어떤 통하는 성질이 존재하고, 그 통하는 성질이야말로 바로 나의 본질일까? 그 환상의 이미지들을 한 줄로 꿰는 기다란 실이 나의 핵심인 걸까?
그렇다면 타인이 내게 씌우는 이미지는 나의 본질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그 이미지가 나의 본질과 전혀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모든 존재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뿐 아니라 그를 바라봐 주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존재한다. 내가 만든 자아상이 타인들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상과 심하게 괴리될 경우, 그것은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펼치는 배우의 연기처럼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반대로 자기 스스로 세운 상 없이 타인들이 내게 부여한 상에만 기대어 살다 보면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야 할 연극에서 그때그때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수시로 역할을 바꾸어 연기하는 엑스트라 배우가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나와 타인들의 시선이 부딪히고 얽혀 있는 영역 속 어딘가에 있다.
나의 환상과 타인의 환상, 그 무수한 환상들을 이어주는 기다란 실, 그 실이 나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아마 노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본질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꿈꾸고 실현해 온 수많은 동경의 이미지들을 다 모아놓고 배열해 봐야 그것을 잇는 변화의 결을 짚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끝까지 정확히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자아상은 흔들릴 것이고, 타인이 내게 어떤 이미지를 씌우고 있는지를 완벽히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까. 도대체 '나'라는 건 무엇일까? 지금의 '나'는 어떤 환상들의 조합인 걸까? 나는 지금 어떤 실을 붙잡고 가고 있는 중일까?
어쨌든 나의 망상병은 상당히 호전된 상태이다. 적어도 환상이 환상이라는 것은 인지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으니까. 예전에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환상이라는 것조차 몰랐다. 지금도 관계에 대한 환상은 여전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착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지금 나를 가장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환상은 타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 관계에 대한 허황된 이미지를 좇았던 정신이 이제는 '나'에 대한 한 가지 이미지에 집중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얼토당토않게 품었던, 망상 같은 환상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지금의 내가 도달할 수 있을 법한 현실적인 환상이다. 현실적인 환상인데 이상하게도 더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체념이라는 창틀 속에 펼쳐진 꿈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내 생애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 환상의 창은 먼 허공에 떠 있던 예전의 창들과 달리 불과 몇 걸음 앞에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도 닿기가 어렵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발목에 엄청난 무게의 모래주머니가 추가로 채워지는 것 같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중도에 다른 환상의 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으려 한다. 매일매일 저 창 속 인물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이 과정이 내가 붙잡고 있는 본질의 실이 끊어지느냐, 굴절되느냐, 혹은 제대로 이어지느냐를 결정짓는 중대한 관문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저 창에 정말 도달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실의 끝에서 보게 될 나의 본질에 훌쩍 가까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 또한 하나의 꿈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와 드라마를 부여하길 좋아하는 나의 병이 다시 도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