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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길

by 이인영
이인영, <돌아가는 길>, 종이에 수채, 22x17.5cm, 2023.6



원점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또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직장을 관둘 즈음 나는 이제껏 내가 걸어온 길을 한번 찬찬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마음먹었었다. 두려움과 소심함 때문에 놓쳐버린 기회들, 쓸데없는 경쟁심과 허영심에 빠져 슬쩍 보고 지나쳐버린 몇몇 표지들, 그 표지들에 남겨놓은 짙은 미련과 갈망의 정체를 한번 직성이 풀릴 때까지 탐색해 보고 싶었다. 그중 하나가 새로운 원점이 되어 앞으로 내가 걸어야 할 단 하나의 길로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가 대체 어디쯤 와 있는 건지 모르겠다. 표지들의 정체를 다 파악하기도 전에, 무언가를 시작해 보기도 전에, 굽이굽이 이어진 기억의 언덕들 사이를 끝없이 돌기만 하다가 남은 생이 다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헤매기를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가슴을 친다.


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는 이런 생각도 든다(다분히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어쩌면 '원점'도, '단 하나의 길'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 건지 모른다. 그저 이렇게 헤매는 것, 현재를 흡수하면서 과거의 길을 끝없이 늘려가고, 그 길 위를 소요하듯 이리저리 떠도는 것. 그것이 곧 나의 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떠돎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기록하는 것. 떠오르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종이 위에 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맨 나의 평생의 업이 아닐까?


만약 이것이 나의 평생의 업, 즉 '단 하나의 길'이라면, '원점'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거를 돌아보기로 결심했던 시점(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시점이 바로 원점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단 하나의 나의 어지러운 길로 들어선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런 지점들은 무슨 운명적인 사건이나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통해 맞닥뜨리는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데, 사실 인생의 정말 중요한 변곡점들은 그렇게 별 사건도 없이, 별 의식도 없이 조용히 형성되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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