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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택한 간극

by 이인영
이인영, <간극>, 종이에 수채, 13.5x16.6cm, 2025.10.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 타인이 내게 기대하는 모습과 기대하지 않는 모습 사이의 간극 속에서 살아간다. 네 개의 욕망이 부딪히고 엇나가고 일치하면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서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만족해한다. 어떤 이미지가 자신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자신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이 감추고 싶은 부분을 확대해서 보는 시선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 외부 세상에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 또한 사람들의 공통된 욕망일 것이다.


내가 지난날 경험했던 이미지의 간극은 주로 '그림을 그리는 나'와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 사이에 형성된 것이었다. 타인이 나를 어느 쪽에 중심축을 두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간극의 성질이 달라졌는데, 가령 누군가가 나를 처음에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강하게 인식했을 때는 그 후에 드러난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의 모습이 준 실망감이 간극의 주된 성질이 되었고, 반대로 타인이 나를 '그림 그리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했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나'의 모습을 상대가 잘 몰라주는 데 대한 서운함이 간극을 심화시켰다.






전자의 경우는 주로 유년 시절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시기에 경험했다. 어느 집단에 있든 나는 '그림 그리는 아이'로 인식되었는데, 운 좋게도 내 곁에는 늘 그런 나의 모습을 좋게 봐주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인간의 다양한 기질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참 어른스럽고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그림으로 칭찬받고 싶다'라는 욕망 외엔 다른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그리고 뭐가 조금만 힘들거나 무서우면 그림 속으로 숨으려는 겁 많고 주변인의 감정에 무심한 아이였다.


그들과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당시엔 이런저런 이유를 추론하다 말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 때문이었다고 거의 확신한다. 그들 대부분이 그림을 떼어냈을 때의 나의 모습, 그림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 너머 나의 미성숙한 모습에 실망해서 떠나간 것이다.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림 그리는 나'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아 나를 실제보다 좋게 평가했다가, 서서히 나라는 아이의 내면이 생각보다 얕다는 것을 알고는 조용히 정을 떼 버렸다. 나는 또 나대로 갑자기 멀어져 버린 그들에게 상처받았다.



두 번째 성질의 간극은 주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때까지 사람들이 나를 그림과 짝지어 보는 시선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굳이 자진해서 그림에 대한 애심을 밝히지 않더라도 사회가 당연히 나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봐줄 것이라 착각했다. 내게 '그림'이라는 단어가 항상 붙어 있는 줄 알았다.


내가 드러내지 않는 부분에 대해 타인이 일부러 수고롭게 상상까지 해서 봐줄 리는 없었고, 따라서 당연히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직장 내 업무를 하는 모습 이외의 모습은 기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림이라는 단어가 떨어져 나간 나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존재했을 때는 알지 못했던 종류의 무시와 냉소, 적대적인 반응을 자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그림이 떨어져 나간 나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미대라는 울타리 밖에서 낯선 프레임에 수차례 걸려본 후에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의도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한, 세상은 나를 결코 그림과 연결 지어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림 그리는 나'의 이미지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자신이 지닌 여러 면모 중 가장 애정하는 부분이 제거된 채 타인에게 평가받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두 가지 종류의 간극 모두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자의 괴로움은 타인이 나를 실제보다 좋게 평가했을 때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나의 실제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 혹은 상대를 실망시킬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후자의 괴로움은 남들이 나의 가치를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데서 오는 속상함이었다. 후자의 경우에서 특히 누군가가 나를 내가 원치 않는 모습으로 딱 고정시킨 채 절대 수정하려는 융통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고통은 배가 된다. 분야와 소속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아마 이 두 가지 종류의 간극이 주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이 두 종류의 간극 중 어느 한쪽을 의도적으로 택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 같다.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감추고 싶은 모습 혹은 무기를 당당히 드러낸 모습과 숨기고 있는 모습 중 어느 쪽을 전면적으로 내세울 것인지 작전을 세워야 하는 때. 젊을 때처럼 무의식 중에 본능에 따라 혹은 허영심에 이끌려 이렇게 저렇게 자기 연출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오는 돌을 막아줄 최소한의 성곽을 두르기 위해서.


'그림'이 내게서 제거되었을 때의 고통을 경험한 나는 현재 첫 번째 종류의 간극을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미 자존감이 많이 다친 상태라 더 이상의 시선의 타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림은 내 안의 여러 모순과 추함의 적나라한 양상을 살짝 덮어주는, 그래서 타인이 공격할 거리를 정확하게 감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뿌연 안개의 장막과 같은 장치이다. 나는 그림이라는 안갯속에 숨어서 타인이 나의 비호감성을 뚜렷하게 파악하지 못하길 바라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종류의 간극을 선택하고 나니 역시 예상했던 문제가 딸려온다. 즉 옛 친구들이 그랬듯 타인이 내게 실망할 일만 남게 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초라한 민낯을, '그림'을 떼어놓은 나를 남에게 보여주기가 힘들다는 것. 그런 일이 또 반복될까 봐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아예 피하게 된다는 것. 그림을 열심히 그리면 그릴수록, 그림이 쌓이면 쌓일수록 외부와 나 사이의 벽이 점점 두꺼워진다.






문득 어린 시절 갖고 놀았던 종이 인형이 생각난다. 100원짜리 동전을 손에 꼭 쥐고 문방구로 달려가, 구석 선반에 쌓여 있는 종이 인형들을 한 장 한 장 들추어 보며 고르는 일이 어린 나의 즐거움이었다. 한참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인물이며 옷이며 구두며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오려내는 행위에서 나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나중에는 종이에 그려진 것으로는 성에 안 차 서툰 솜씨로 갖가지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 인형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 넣었다. 그렇게 인형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정성을 들였던 이유는 끄적이고 오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워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것들을 가지고 이웃집 친구들과 재밌게 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종이 인형들이, 내가 그린 그림들이 오히려 나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있다. 그림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림을 넘어 사람을 직접 마주하는 일은 이제 버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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