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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해야 하는 사람

by 이인영
이인영, <내가 있을 곳>, 종이에 수채, 14.5x20.5cm, 2025.1.



준비 기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있다. 모든 일이 처음에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강인해지고 싶다, 견고해지고 싶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라고 염원했던 몇 년 전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나는 훨씬 더 나약해져 있고, 훨씬 더 흐트러져 있고, 훨씬 더 깊숙한 곳에 갇혀 있다. 자신의 상태와 그림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타인의 시선과 얼마나 어긋나 있을지 가늠조차 안 된다.


삶에 대한 은둔적인 자세는 내가 지향해 왔던 것이 아니다. 은둔적인 삶은 그것이 아무리 성실하고 청렴할지라도 속세의 치열하고 탁한 삶보다 낮은 단계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은둔자들이 자신의 삶을 아무리 고상하게 연출해도, 혹은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들이 아무리 고상하게 미화시켜 주어도 내게는 그것이 본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인생관은 때로 기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은둔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조금 다른 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모든 존재는 결국 자신의 타고난 기질에 맞는 삶의 방식으로 종착하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집단의 외곽에 있을 때 비로소 깊은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 사람들 앞에서의 '나'의 언행에 대한 이질감 때문에 늘 괴로워하는 사람, 그 이질감과 괴로움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심해지는 사람, 그런 사람은 그의 본성이 사회를 겉돌도록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는 유독 은둔에 대한 애착이 본성 깊숙이 새겨져 있는 자들이 있고, 그런 이들은 아무리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아도 결국은 다시 은둔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는 게 아닐까.


예전에는 그저 나약함과 회피의 결과로만 보였던 은둔자의 삶이 어쩌면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능동적인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과거에 내가 그토록 열심히 사회 속으로 파고들려고 애썼던 건 나의 본성이 계속해서 나를 사회 바깥으로 끌고 가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이 본성에 순응해야 하는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이 전사형으로 태어나는 건 아닐 것이다. 부딪히기보다 피하는 쪽을, 앞을 내다보기보다 뒤를 돌아보는 쪽을, 새것보다 오래된 것을, 안에 있기보다 바깥에 있는 쪽을 더 자연스럽게, 더 긍정적으로 느끼도록 설계되어 태어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늘은 그런 이들에게도 그만의 존재 의미와 삶의 미학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놓았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 몫을 잘 해내어 세상사의 조화로운 운영에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 또한 숨어 지내는 나약한 삶에 대한 변명이고 미화일까.


이 은둔은 일시적인 것일까, 아니면 내가 끝까지 지켜야 할 나만의 특별한 삶의 방식일까. 따가운 햇살을 피해 어떻게든 한 조각 그늘 속에 생활 반경을 맞추어 살아온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이대로 살면 큰일 나겠다는 경각심이라든지, 사회생활을 다시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투쟁심 같은 건 좀처럼 생기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제는, 이 삶의 방식을 가능한 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이 발상은 건강하지 못한 것일까? 병든 생각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즘 내가 이 은둔의 시간 속에서 불안과 우울로 떨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 자리에 드디어 안착한 듯한 묘한 안도감 또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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