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절대 그러지 마
살아온 날들로 보자면 나보다 훨씬 먼저 인생을 경험한 선배이자 동료는 종종 ‘내가 살아보니까’로 시작된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다. 개중에는 '그래도 결혼은 해봐야 한다.', '너무 깨끗하게 살지 마라 피곤해진다', '적어도 월급의 절반 이상은 저축해라' 등 주옥같은 명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동료와는 함께 일하면서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본인의 고집대로 하려는 성향이 강한 동료와 그에 못지않게 FM적인 나였기에, 융통성 없는 사람들끼리 만나 싸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서로 지지 않고 팽팽하게 말을 주고받다가도 결국은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와 주고 져주던 동료가 있었기에 큰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또 매번 부딪히면서도 미워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 타지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다는 걸을 알고는 다른 동료들 몰래 먹을 걸 주머니에게 넣어준다거나 반찬거리를 챙겨 와 가방에 넣어주곤 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작은 신경전을 벌이다가도 쉬는 시간이면 집에서 삶아온 계란이나 귤 따위의 간식들을 주머니에 몰래 넣어주는 이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좀 더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해와 유머를 가지고 동료를 대했더라면 더 좋은 관계를 쌓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다. 이제와 생각하니 참 미안하고 고마운 동료였다.
이같이 애증의 관계였던 동료와 함께 매장을 함께 보고 있던 중이었다.
“OO씨는 절대 그러지 마”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하고 쳐다보니
“내가 B한테도 이야기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있는데서는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웃고 그래야지 표시내면 안 되는 거야.”
“무슨 일 있으셨어요?”
“지난번에도 매니저랑 같이 일하는데 얼굴이 시커멓게 굳어서는 내내 표정이 안 좋더라고, 집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가는 모르겠지만 출근하자마자 기분 안 좋은 채로 와서 내내 티 내고. 같이 일하는 사람은 정말 괴로워”
“내가 다른 데서 일하면 이렇게 까지 안 힘들거든, 다른 데서는 서로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도 빨리 가. 그런데는 일주일 내내 해도 하나도 안 피곤한데 여기는 이틀 삼 일만 하면 온 기진이 다 빠져서는...”
이야기를 듣고는 지레 마음이 찔려 미안해졌다. 상사와 데면한 나의 관계가 매장 분위기를 혹여 경직되게 만든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근무하지 않는 때에도 매장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그것만은 아닌 듯했다. 상사는 평소에 기분이 좋지 않거나 감정이 격해지면 곧바로 표정과 말투에서 티가 나곤 했다. 언젠가는 매니저가 통화하며 낸 호통에 매장에 있던 고객과 내가 함께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있다. 이런 일이 꽤나 자주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이라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노력을 한다 해서 좀처럼 고쳐지는 것도 아니라 매니저의 이런 면모가 일정 부분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매니저나 나나 그런 면에서 상사로서는 실격이다.
이런 매니저를 잘 다루는 사람이 있었는데, 메기였다. 본인 스스로도 어르신 다루는 데는 자신 있다 말할 정도로 성이나 약이 잔뜩 오른 사람을 대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얼굴 근육이 떨리는 게 의식될 정도로 경직된 분위기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상사에게 말을 거는가 싶더니 어느새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상사의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에서 평소 큰 문제가 되지 않던 부분을 지적하고 들어도 “아이고 몰랐네요.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하고 만다. 감정을 드러내며 윽박지르더라도 “한번 시도해 봅시다”라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했다. 그러면 상사가 내지른 부정적인 감정이나 말들은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없어지기도 하고 상사 스스로가 머쓱하게 여기기도 했다.
상대방이 쏘아 올린 부정적 태도에 자존심을 내려놓고 유머로 응수를 하는 태도는 퇴사 후에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앞으로 비슷한 유형의 상사를 만나면 이렇게 해야지라고 하는 교본서와 같다고나 할까.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유형의 사람을 한 명쯤은 만나게 되는데, 이가 상사라면 매우 불행한 일이다. ‘왜 또 뜬금없이 짜증이야.’라는 생각이 밀려오면 똑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쉽다. 이럴 땐 감정을 삭제하고 그 속에 든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사람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짜증이나 화가 부당하거나 지나치게 느껴진다 해서 똑같이 감정적으로 응수하다간 쓸데없는 감정 소모와 소모적 관계로 인해 괴로운 시간을 보내기 십상이다. 상대의 감정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 스스로도 반성하게 된다. 누군가 기분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시도한 것 중 가장 효과 있었던 방법은 부정적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자’라고 수십 번 되뇌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얼굴에 티가 나는 것은 막을 수 없어서 피에로처럼 인위적으로 입꼬리를 바짝 위로 올리고 입술이 바들거릴 정도로 종일 힘주며 시간을 보내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얼굴 근육부터 시작해 온몸이 결리고 쑤셔댔다. 이것 말고 혹시 부작용이 적은 좋은 방법이 있다면 누군가 귀띔해 준다면 참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