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지 마세요
20대 때 아르바이트 두세 개를 열심히 돌리며 돈을 모으는 재미로 일을 해왔지만, 정작 정규 직원으로 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르바이트생 신분에서 벗어나 ‘직원’이라는 신분으로 일한 첫 직장이 백화점이었다. 그동안의 이력으로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의 경력이 가장 길었던 터라 타 지역으로 이사를 하면서 자연히 동일 직종에서 일하는 스스로를 떠올렸다. 그러나 구직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 직종 구분 않고 할 만하다 생각했던 공고에 다수 지원을 하였고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곳이 백화점이었다. 이곳에서 운명처럼 나의 정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운명이라는 말은 이런 곳에서 쓰이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남들보다 한참이나 뒤늦은 첫 직장 경험은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더듬어 가듯이 사회생활이란 무엇인지 어렴풋이 윤곽을 잡아나가는 것과 같았다. 인스타그램 피드 속 직장인들의 사연이나, 네이트판 같은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직장 내 정치, 직장에서의 빌런, 직장 속 인간관계 등에 관해 '그래 이건 맞지', '에이 이건 너무했다', '아니 이럴 수도 있지 않나' 했던 것들을 현실에서 맞닥뜨렸다. 이전에 읽었던 무수한 사연들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이야기 속 실화와 현실에서의 직접 경험은 또 달랐으니까.
아르바이트생으로서의 사회생활과 직원으로서의 사회생활은 너무 달랐다.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때는 1인 근무지를 제외하고는 적게는 2명 많아봤자 4명 이상의 인원과 함께 근무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백화점에 들어와 보니 매장 동료, 타매장 동료, 사무실 직원 등 맺어지는 인간관계가 배로 확장되었다. 업무 특성도 달라서 혼자의 힘으로 오롯이 해낼 수 있는 것은 잘 없고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거나 거쳐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내 일만 열심히 하면 인정받았던 때와는 다르게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입사 초기, 수입제 비누를 대폭할인하여 판매했던 때가 있었다. 특정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비밀 세일도 아니었기에 매장에 방문하는 고객마다 열심히 설명해 판매하곤 했었는데(해당 제품이 큰 설명을 요구하지 않아 판매하기 가장 만만한 것이기도 했다.) 매니저가 출근하지 않은 어느 날, 뒷 매장의 매니저가 찾아와 비누 세일을 하느냐 물어 평소대로 열과 성을 다해 판매하였다. 그다음 날 매니저에게 비누를 많이 팔았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뒷 매장의 매니저가 사갔다는 것을 알고는 매니저가 벌컥 성을 냈다.
“뭐? OOOO매장 매니저가 사갔다고?”
뭔가 잘못되었구나 싶어 되물었다.
“네.. 세일하냐고 물으셔서 한다고 말씀드리고 팔았어요.. 직원은 사면 안 되나요?”
그러자 “그게 아니고…”라며 둘 사이에 어떤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는데, 퍽 당혹스러웠던 경험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 알면 얼마나 많이 안다고, 매장 관계까지 고려해 물건을 팔아야 한다고?’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사소한 것을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어디든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사람이 모여 일을 하는 곳이다 보니, 일 외에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놀랐다.
매장에서의 동료 간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근무하는 층의 담당자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매장에 어려움이 있을 때 원활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 3년에 접어들자 백화점에서 맺어지는 모든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매장에서 동료들과도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층 담당자와도 썩 매끄럽지 못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서 백화점에서의 앞날이 깜깜할 지경이었다. 사회생활은 과연 뭘까 생각하며 깊은 시름에 빠졌다.
당시 서류에 사인받을 게 있어서 고민을 하다 동료에게 대신 사무실에 사인을 받아 달라 부탁한 적이 있다. 그때 부탁을 하면서 담당자와의 껄끄러운 관계에 대해 털어놓았는데, 동료가 “OO씨한테만 그러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안 그래요.”라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미끈하게 구는 재수 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나한테만 그랬다니. 그럼 나한테 문제가 있나 싶어 충격을 받았다. 평소 비협조적이고 ‘내 일 아님’식의 태도로 공공의 적이었던 터라 모두가 나와 같은 결의 감정과 태도로 상대방을 대한다고 생각했던 게 가장 큰 오산이었다.
특정 인물에 대한 평가와 감정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관계와 일치하는 삶을 살아왔던지라 모두가 나와 같이 사무적이고 다소 냉랭한 태도로 상대방을 대할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모두 겉으로나마 살가운 관계를 유지해 왔던 거다. 사적인 인간관계와 공적 인간관계는 이렇게나 다른 것이었는데, 나만 눈치채지 못하고 사방에 적을 만드는 태도로 일해왔음을 그제야 인지하게 되었다. 이런 식의 태도로는 앞으로 그 어떤 일에도 도움을 구하기 어렵고, 설사 업무상 협조를 요청한다 하더라도 빠른 피드백과 적극적인 태도를 기대하긴 어렵겠구나 깨달았다.
어느 날 동료가 했던 또 다른 말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원하는 걸 해주면 돼요. 자신을 높여주고 인정해 주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조금만 맞춰주면, 나한테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니까요.”
이전엔 내가 보기에 옳지 못한 행동이나 언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거나 혹은 맞춰주려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가식적이고 부정적 의미에서 세속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뭘 모를 때의 이야기이다. 사회생활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내 일만 잘하면 되지’라고 세워둔 마음속의 기조가 무너지는 순간이 분명 온다.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고 모든 과정에서 크고 작은 타인의 협조와 도움이 필요하다. 앞으로 사회생활을 해나가시는 분들에게 뼈저린 경험을 빌려 말씀드린다.
“적을 만들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