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주 대백과 사전'

by 김영


이 글은 '트랄팔마도'를 경험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밀레니엄 전후에 살았고, 다른 지구인과의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끝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풀린 시간'이라고 부르며 지구로부터 '트랄팔마도어'라는 먼 곳까지 데리고 왔다. 내 허락 없이 나의 삶에 개입했다. 왜 이래야만 했는지 설명을 듣지도 못했다. 얼토당토않은 얘기가 아니다. 전지전능한 시간의 협조와 묵인 아래 가능했다. 내가 트라팔머도인을 처음 만난 것은 지구의 시간으로 2010년경(내 나이로 말하면 내 몸 위로 14523번의 밝음과 어둠이 지나갔을 때이다) 여름날 마지막 햇빛이 어스레히 비출 무렵이었다. 낮과 밤이 서로를 외면한 채 스쳐갈 무렵, 멀리 몇 채의 검은 구름이 웅장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바람 속 비에 이끌려 공원을 거닐고 있었다. 꽃잎들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파리에 흠뻑 담겨있던 물방울들은 사방으로 튕겨졌다. 비 오는 공원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의 변주곡이었다. 연못에서는 동심원과 동심원이 만나 경계를 흐리고, 촉촉한 땅에서는 싱그러운 흙냄새와 풀냄새를 뿜어내고, 공기는 끈적이는 관능이 있었다. 아찔한 관능의 순간, 내 의식은 마치 수챗구멍 속으로 소용돌이치면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서는 소화불량에 걸린 배가 토하듯이 어딘가로 뱉어졌다. 그곳이 '트랄팔마도'이다.


잠시 옆길로 새자면, 지구에서 나('풀린 신발 끈'이 아니라 '풀린 시간'이다)의 직업은 수학강사이다. 수학강사란 정의(定義)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람들이다. 정답보다 중요한 건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는 사람이다. 물론, 말로만이다. '수학의 본질은 자유'라는 말은 괄호 속에 넣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랬더랬다. 뿐만 아니라, 근대의 시초를 '데카르트'와 '세르반테스'라고 생각하며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의 특별함을 믿었고, 인간 문명의 위대함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뿌듯함과 유일하게 죽음을 이해하는 인간임에 긍지를 가졌던 지구인이었다. 한때는 그랬더랬다. 여기까지는 봐줄 만 하나, 성격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있다. 일단, 말더듬으로 낯선 사람은 피하고,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이 있다. 그리고,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갈림길에서는 항상 머뭇거리고, 다분히 감성적인 데다 모호함을 달고 살았다. 학원일을 빼고는 잘하는 것이 없다. 학원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한다면 사기당하기 딱 맞지만 학원이라는 새장 안에서는 잘난 척한다. 학생들에게, 자기에게도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이 존재했음을 들먹이며, 너희들의 젊음도 한 때라고 질투 섞인 말을 하며, 마음속으로는 언젠가는 너희들도 나와 같은 동일한 범주에 묶이는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새장에서만 사는 새들은 새장 문을 열어두어도 도망갈 생각을 안 한다. 날갯짓하는 법을 까먹은 거다. 누군가 새장에서 내동댕이 치면 한쪽 구석에서 가까스로 날갯짓하는 법을 기억하고서 다시 새장으로 들어가려고 새장 주변에서 푸드덕거릴 것이다. 딱 내 처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트랄팔마도어'에 대해 대충이나마 말해야 할 거 같다.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는 것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다. 선생들이 원래 그렇다. 누군가는 허황된 이야기라고 하며 나를 가벼이 여길 수도 있지만 감수하겠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나을까? 음,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기어 다니지만 그들의 <우주 대백과사전>부터 시작하겠다. 짐작하겠지만 그들의 과학기술은 지구를 정복하고도 남는다. 다만, 참혹한 싸움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진작에 알았기에 그럴 의도는 없다. 그들은 지구를 지켜보면서 '아리까리 행성'으로 명명했다. 1914년과 1939년의 두 번의 잔악한 대청소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아리까리 행성을 보존할 것인가, 붕괴시켜버릴까에 대해서 0.5초 동안(지구시간으로 백 년 동안이다) 대판 말다툼을 벌렸다. 결과는 1초만 더 지켜보자는 것이다. 물론 '우주 궁전 평의회' 투표의 결과이다. 그럴만한 이유는 있지만 나중에 언급하겠다. 어쨌든 이 결정은 라쿤데력 23929년에 일어났다. 트랄팔마도의 박물관에는 살생을 즐기는 동물의 표본으로 인간이 전시되어 있다. 제목은 '혼돈과 잔인성'으로. 그렇대도 할 수 없지.


<우주 대백과 사전> 3979362쪽에서 3994857쪽 사이의 '또 다른 행성'편의 '아리까리 행성'편에는 당시의 '우주 궁전 평의회 회의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우주 행성 파괴 전문위원):(잔뜩 흥분한 어조로) 맙소사! 하늘에서 십자가 모형의 떼거리가 비를 내리자 지표면은 불꽃놀이, 천둥소리, 땅의 흔들림이 시작되고, 수직은 수평으로 나자빠졌다. 비에 맞은 모든 것들은 드러눕고 격한 몸부림을 끝으로 땅과 하나가 되었다. 아주 못돼 처먹은 포유류이다.


별을 그리다(우주 개발 청장) : (체념하듯이) 지구 표면의 도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원숭이 같은 존재 말고는 어느 포유류도 동료와 이웃사촌인 다른 포유류를 못살게 굴고 모든 자연자원을 혼자 써버리지 않아. 그런 포유류는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어. 적어도 포유류는 주변 환경과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지. 증식하면서 모든 자연자원을 아낌없이 써버리지는 않아. 이들은 질병이고 바이러스야. 더 위험하기 전에, 원숭이들이 고귀한 땅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전에, 돼지와 말과 소가 더 이상의 모멸감에 몸부림치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돼.


너의 다리가 우리 마을에 서게 하라(우주 유전정보 청장) : (조금 굳은 표정으로) 우주의 역사는 갈피를 잡기 힘들다. 지구인도 농경과 목축을 하면서 먹을 것이 눈앞에 있는데도 참고 기다린 적이 있다. 그리고 지구를 몇 번이고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를 아직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우주의 생태학적 연구에 필요하다. 이런 이유를 제 처 놓더라도 우리 같은 고등한 지적 생명체가 하나의 지적 생명체를 함부로 사멸시켜서는 안 된다.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우주 행성 파괴 전문위원): 그게 가능한 일일까? 지구인에게 희망을 가져본다는 게. 지구인들은 '사랑', '휴머니즘', '평화', '관용'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 말은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서로에게 모르는 체하라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수치스러운 행동을 꺼리지 않는 그들은, 인간 중심적인 관점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 지금은, 그들의 과학기술이 미천하지만 지금의 발전 속도 볼 때 언젠가는 우주의 평화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들이 한번 발을 붙인 곳은 초토화되었다. 그들은 암덩어리고 우리는 치료제이다.

...


이런 격론 끝에 좀 더 지켜보자는 느슨한 결론을 내렸다.


<우주 대백과 사전>은 일종의 전자책이다. 구판이지만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들어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편집자에 의해 쓰여 문체가 들쑥날쑥하다. 마치 내 글과 같다. 다음은 <우주 대백과 사전>의 '서문'과 '추천사'이다.


서문

우주는 크다. 허벌나게 크다. 지금까지 보거나 상상한 가장 큰 것보다도 정신이 아찔한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더 크다.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다. 이런 무한대의 크기가 덧없이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어찔어찔하다.

......


추천사


몇 번이나 막막한 어둠을 만날 때가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이 길이 맞는 건지, 어느 만큼 계속 가야 할지, 그런 순간 별빛과도 같은 책이다.

<뜨겁게 사랑받을 만한 행성을 찾아다니는 떠돌이들의 모임>


우리는 삶이라는 복잡한 길을 걷고 있다.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안정된 수중생활과 미지의 지상 생활을 놓고 백가쟁명의 기치를 걸고 토론과 비판을 거듭했다. 한 번도 우리의 선조가 태어났던 물속을 떠나지 않은 물고기 선조, 물속과 땅을 오가는 양서류와 파충류 선조, 불안정한 대기와 땅을 견디지 못해 안정적인 바다로 다시 들어간 선조, 비록 그들을 숲과 들과 산과 하늘로 모셔가려는 무수한 시도는 반짝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들의 판단들은 모두 권위로운 판단이었다. 그것이 과거의 반영이든 급진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든 존중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한때 새로운 호흡법을 위한 집요한 교육과 지느러미가 팔다리로 바뀌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무사히 통과하여 단단한 땅을 성큼성큼 걷게 되었다. 이 멋진 발걸음이 우리 종족의 유사성을 차이점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가를 경계로 저쪽과 이쪽을 나눌 수는 없다. 우주 속담에 '우물 안 양서류'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이 우물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하기를 바란다. 우주에 관한 끝없는 고민에 대한 진심어림이 느껴진다. 놀랍도록 튼실한 책이다.


주해(註解) : 물고기 선조가 물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암초에 달라붙어 파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조개 할아버지 선조를 돌보기 위해서다. 조개 선조 할아버지는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뭍으로 나가겠니, 젊은 너희나 내 걱정 말고 가렴"이라고 말했지만 뿌리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물고기 선조에 대해선 미안한 마음이 비늘처럼 가슴에 박혀있다.

<우주는 허다한 '어쩌면'으로 이루어졌다를 밝히는 은하수 리뷰지>


긴 말이 필요 없다. 모든 궁금증은 이 책 한 권이면 된다. 우주의 기원, 진행, 쇠락, 기술, 과학, 행성들의 문화, 삶, 경험, 양식, 신비 하나하나에도 놀랍고 재미있고 깊은 깨닫음을 주기에 흠잡을 데가 없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흔들리지 않는 인내심과 굳건한 믿음으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귀중한 지침서임을 인정한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

<우주 평온한 삶 연합 은하계 남단 연락사무소 5829 지국>


<우주 대백과 사전>은 없는 게 없다시피 하지만 <우주 공동체를 위한 제3소위원회>에서는 개정 신판을 위해 사전조사 중이다. 그런 이유는 25만 광년 떨어진 '돌마니아 행성'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는 <너희들이 모르는 우주에 대하여 말할 거야>가 지혜의 보고인 <우주 대백과 사전>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 공동체를 위한 제3소위원회>는 <우주 대백과 사전>의 신판을 통해 또 한 번 큰 일을 내려고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