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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Sep 30. 2023

약간의 역사

<7화>

히치하이커


11월의 셋째 주 권태로 가득 찬 목요일 오후, 베란다에서 집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날, 그때 그 사건이 어떤 종류의 충격을 일으켰는지는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내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된 건 맞다. 그때를 기점으로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날이 있기 전까지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무탈한 날이 반복되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이제는 인간의 목소리에 오히려 안정감을 찾고, 인간의 손을 타는 것을 자연스레 여긴다. 인간의 냄새를 떨치려고 몸 구석을 정신없이 핥기보다는 엉클어진 털을 가다듬었다. 그들의 미끈한 얼굴과 손, 서있는 모습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동안 그들과의 동행에 신경을 쓴 건 맞다. 천방지축으로 나대지도 않고, 마냥 수줍어하지도 않은 적정한 선을 유지했다. 일전에 말했던 중용을 실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역동성보다는 지속성에 중심을 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히치하이커를 생각해 봐라. 딱 내 처지이다. 어렵게 차를 얻어 탄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운전자는 어색함과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으나 말썽을 피우거나 탐탁지 않으면 태운 것을 후회하고 결단을 내린다. 운전자의 비위를 맞추고 매력을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매력도 퇴색된다. 히치하이커 입장에서는 이 동행이 얼마나 갈지가 최대의 관심사이다.


작은 숲 28번 길


그날 나의 기억은 멱살을 잡힌 듯이 4개월 전의 작은 숲으로 끌려갔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언젠가 아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준 이야기다. 그가 말한 그대로, 토씨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당신들에게 전하려 한다. 잊을 만하면 괴조가 날아들어 불길한 소리로 울고는 기억의 상처를 쪼아댔던 이야기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지를 않았던 그런 이야기다. 길을 걷거나 뛰고 있을 때 또는 한가롭게 그루밍을 할 때처럼 전혀 그럴 법하지 않은 순간에도. 왜 그런 거 있잖나, 유행가의 한 부분이 계속 떠올라 하루종일 흥얼대거나 영화를 보고 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어떤 장면이 다시 떠오르는 거. 왜 그 순간에 그때 일이 다시 기억났는지는 모른다. 여하튼, 일상적 비현실적인 날임에 틀림없다.


진통은 밀물처럼 덮쳐왔다가 썰물처럼 쓸려갔다. 새끼는 어미 배 속에서 세차게 몸부림치며 '태어나고 싶어, 날 꺼내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진통간격은 짧아지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은 격렬해졌다. 드디어 새끼의 모습이 보이자 배에 힘을 주었다. 뭔가 물컹하며 서서히 미끄러져 나왔다. 형아는 별 탈 없이 나왔다. 꼬물거리는 작은 생명체가 끈적끈적한 투명한 점막에 싸여 있다. 어미는 눈을 감은 채 꼼지락거리는 새끼를 핥아서 막을 제거하고 탯줄을 끊고 태반을 먹었다. 새끼는 첫 숨을 뱉어냈다. 한 생명이 태어났다. 어미는 생전 처음 겪는 일을 능숙하게 효율적으로 했다. 그러고 나서 셀로판 같은 막에 둘러싸인 내가 모습을 보였다. 머리가 아니라 다리부터 보였다. 어미는 미끈거리는 뒷다리를 입으로 조심스레 당겼다. 잘된다 싶었을 때 머리가 걸렸다. 근육의 이완과 수축을 거듭하면서 어미는 난리를 쳐댔다. 다행스럽게도 별 탈 없이 끝났지만 그 과정에 어미는 힘이 빠져 정신이 반쯤 나갔다. 그것으로 끝난 듯 보였다. 뒤늦게 어미의 배가 다시 움직였다. 새끼 한 마리가 더 나오려고 한다. 몇 시간 동안 자궁에 있었다면 생존 확률이 희박했다. 어미는 다시 힘을 내기 시작하고 허여멀건한 미끈한 것을 쏟아냈지만 숨을 쉬지 않았다. 어미는 불안한 듯 갓 태어난 새끼를 계속 핥고 또 핥았다. "아가야, 힘을 내렴. 너는 할 수 있어!"라고 울부짖으며 핥았다. 동생은 끝내 첫 숨을 토하지 못했다.


아비는 지친 어미와 우리 형제를 뒤로 하고 축 늘어진 동생을 입에 물고 더벅더벅 멀어져 갔다. 사위가 잔뜩 흐린 하늘에는 배 불룩한 먹장구름이 머리 위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은 떠들썩한 비들의 무리였다. 번개는 시커면 하늘을 뱀처럼 가로지르며 번뜩이고, 천둥은 닥다글닥다글거리며 고막을 때리고, 소낙비연신 구역질을 해 대며  구르는 수은처럼 지표 위를 튕기며 흘렀다. 사나운 빗방울에 초록 잎들은 떨어져 웅덩이 여기저기를 떠다니고, 녹갈색 흙과 회갈색 나무줄기는 빗줄기로 거무죽죽했다. 아비는 나무사이에 동생을 잠시 내려둔 채 젖은 흙을 파기 시작했고 동생을 그 자리에 눕히고 젖은 흙과 나뭇잎을 미친 듯이 덮고 어디론가 정신없이 뛰어갔다.


나무 위에서는 미동 없이 그 광경을 빈틈없이 지켜보는 차가운 시선이 있었다. 아비가 자리를 비운 후 지상으로 날씬한 몸을 내리꽂아 먹잇감을 낚아챘다. 날카로운 발톱에 잡힌 사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한참 동안 고개를 주억대더니 주위를 으스대다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올라갔다. 검붉은 흙과 나뭇잎들이 들썩이고 빗방울이 튕겨졌다.


그 일이 일어난 후, 어미는 집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횅하니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온 어미의 탐스러운 털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혹시라도 있을지도 모르는 자식의 흔적을 찾아 헤맨 듯하다. 어미는 이웃들과 대화도 꺼렸다. 한때는 주변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뿐만이 아니라 대화를 주도한 적도 꽤나 있다.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낯설고 어색함을 버티기 위한 유머도 사라졌다. 다들 악의는 없었겠지만, 호기심에 찬 이웃들은 어미가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어떤 친구는 모든 걸 이겨내라고, 사는 건 다 그런 거라고 말했다. 인간들도 간혹, 그런 말을 하더라. 나는 그런 사람들이 가장 무섭다. 여하튼, 어미는 '내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럴 순 없어.'라는 말을 간혹 되뇌었다. 가느다란 목소리에는 절망감, 불안감, 무기력이 스며 있었다. 적어도 내가 듣기엔 그랬다.


사냥꾼의 변심


어미와 아비는 세상이 바닥모를 끔찍한 곳임을 경험했고, 자연의 선하지 않은 의도에 몸서리쳤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완전한 게 사랑이다. 우리 가족에게는 하물며 불행이 끼어든 상태였다. 각자가 불행한 기억을 지워버리려 노력할수록 미로처럼 얼키설키 서린 기억의 거미줄에 포박당하곤 했다. 아비와 어미 사이의 다정함은 줄어들고 아마 그것 없이 여생을 살지도 몰랐다.


해가 숲 위로 편편히 떨어져 내린 어느 날, 아비는 형아와 나를 데리고 숲 속을 향했다. 발목을 덮는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비는 어떤 움직임의 파동을 느끼고 몰래 뒤를 밟고 몸을 낮추고 잠복을 하였다. 잠복은 상황을 재정비하는 것이다. 꼿꼿하던 귀는 접히고 입은 긴장 하여 실룩거렸고 시선은 고정되었다. 사냥감이 한눈을 팔면 거리를 슬금슬금 좁혀 사냥감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든다. 여기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시선은 사냥감에 향해있고 근육을 긴장시켜 급습할 준비를 한다. 귀와 수염은 뒤로 접히고 근육은 뼈를 타고 등을 따라 출렁이고 엉덩이는 씰룩씰룩거리며 무섭게 집중한다. 다시 사냥감이 한 눈을 파는 사이 전광석화와 같이 몸을 날린다. 실패다. 실패를 했지만 실패자라는 느낌은 없다. 본성에 충실한 진심이고, 자신의 존재이유이고, 이성이나 논리보다는 직관을 믿는 태도이다. 성공적인 사냥을 위해 공격성을 조절하는 인내심. 공격하고 싶은 열망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열망을 조절하는 인내심이다. 아비는 열망과 인내의 불협화음을 즐긴다. 행복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불편함을 끌어안아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나들이처럼 보였다.


그랬던 아비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 숲 속을 돌아다니면 잃어버린 자식이 생각나든지 아니면 반쯤 정신 나간 어미에 지친 건지는 모른다. 그가 사냥을 버린다는 것은 인간처럼 순환적인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사냥꾼으로 삶은 매 순간이 모험이다. 반복적인 삶에서 오는 권태가 없다. 순간에 기대어 살기에 매 순간 충만한 삶을 산다. 현재의 삶에 충실한 삶이다.


그 후, 아비는 산책로 주변을 슬렁슬렁거리고, 화물차트럭주위를 감돌기도 하고, 쓰레기더미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무심코 길가의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운 좋게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를 산책로에서 자주 만났다. 날씨에 관계없이 여러 옷을 겹쳐 입었던 할아버지는 사료를 챙겨주곤 했다. 아비는 시간 맞춰 산책로를 나갔고, 할아버지 발치에서 발정기가 아닌데도 뒹굴었다. "십팔 놈의 고양이", "저놈의 고양이 새끼"라는 천박한 말을 듣거나 여차하면 몸이 던져지거나 머리에 무언가를 맞거나 배를 차이거나 차에 몸이 눌리거나 먹지 못할 것을 먹고 피를 토할 수도 있다. 배를 걷어 차여도 아픔을 느낄 새 없고,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도, 멀리 달아나지 않으면 더 험한 꼴을 당하고 마는 세상인데 그나마 운이 좋은 거다. 그렇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밤이 이슥한 시간에 들어왔고, 바람이 불던 날 집을 떠났다. 바람이 아비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약간의 역사


그렇다, 가족과 헤어지고 집사와 생활한 이후, 몇 가지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다른 종과의 동거니 완벽한 조화는 되레 이상한 일이다. 뿔뿔이 흩어진 나의 가족만큼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집사의 가족도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음을 눈치챘다. 집안마다 아픈 구석은 있기 마련이다. 거실의 가족사진에는 엄마집사와 할아버지집사도 있다. 조금씩 얻어들은 바, 누나의 엄마는 암병동에서, 할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얼굴이 시트로 덮였다. 물론 사람들이 죽음에 관한 신파조의 이야기를 싫어하는 건 안다. 알면서 굳이 말하는 이유는 소멸한 집사가족에 대해 약간의 역사를 말해야 할거 같아서다.


먼저 누나집사의 엄마이다. 누나의 엄마는 장녀로 태어났다.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있다. 살림밑천을 넘어서 집안형편에 꿈을 접었고, 지금으로선 수긍하기 어려운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양보하고 끊임없는 금지와 마주했다. 이십여 년의 결혼생활은 두 남매만을 흔적으로 남겼다. 그래도 롤러코스트 같은 인생에 행운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삶이라는 괴물은 그녀를 나뭇가지처럼 부러뜨렸다. 그런 그녀에게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과 찌르르 저려오는 느낌으로 불길한 증세는 시작되었다. 불안을 잠재워 주기를 간절히 기대했던 의사는 정밀검사를 위해 그녀를 병원 여기저기로 보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온몸으로, 암은 사람들의 소곤대는 소문처럼 온몸으로 퍼져 갔다. 나무줄기의 수줍은 꽃봉오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것과 같았다. 수술하고, 항암 치료하고, 방사선 치료도 했다. 약봉지는 서랍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몸은 약들의 저장창고였다. 참을성 많던 그녀도 항암 치료과정은 많이 힘들어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일상적인 대화를 하던 그녀는 몇 분 만에 호흡곤란을 겪기도 하고, 산소포화도도 떨어지고,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을 했다. 그 이후에는 아프다면 진통제를 주고, 목이 마르다고 하면 수액을 놓아주고, 숨이 가빠지면 산소호흡기를 달아주었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제스처이다. 죽음이 다가오면서 임종실이라는 1인실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똑같은 몸이었지만 그녀의 육신은 온기를 잃어버린 체, 유리창을 지나쳐 온 평행사변형의 햇빛 속에 가로놓여 있었다. 기적같이 바라던 일상 대신 죽음이 가족 앞에 왔다.


그 무렵,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삶도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또다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안정적이다가도 새로운 증세가 반복적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서로가 지쳐갔다. 노년은 무자비한 전투이다. 이 전투가 무자비한 이유는 하필 투지를 불태우기 어려울 때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스스로 삶을 정리하기를 기대했다. 두 번에 걸친 시도는 불행히도 성공하지 못했다. 어쩌면 삶을 연장하는 것은 죽음의 고통을 연장하고, 삶의 노고로부터 도망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죽음은 그나마 남아있는 자신의 품위와 영화를 지켜주고, 그의 지나온 세월을 용서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수면제였다. 수면제를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넘쳤다. 그에게는 수면제는 죽음으로 이끄는 희망열차다. 깨어있는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그 정도 나이가 들면 몇 가지 기술만을 부린다. 자고, 먹고, 자고, 먹고, 또 자고를 지겨울 정도로 반복한다. 상승과 추락을 반복했던 꿈의 몽롱함이 멈추면 신경질을 부린다. 삶이 지겹다고. 또다시 살아난 게 지겹다고. 거동이 불편한 그의 온몸은 멍투성이었다. 당연히 가족은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요양원에 보냈다. 집에서, 자신의 침대에서, 죽게 해 달라라는 간절한 소망을 외면했다. 그를 위한다는 말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존엄을 빼앗아버렸다. 그는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었지만, 요양원에 보내지고 이 주 후 하나의 쓸쓸한 주검이 되었다. 얼굴은 미라처럼 오그라들었고 쭈굴쭈굴한 메마른 주름살 투성이었다. 그런 골동품 같은 늙은 남자는 흰 시트에 덮인 체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 나갔다. 그리곤 자신의 마지막을 환대하는 불길의 날갯짓으로 던져졌고, 최후의 불길은 그를 할퀴고 집어삼켰다. 뭐,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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