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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Sep 30. 2023

인간 탐험의 시작

<6화> 


1. '여기가 어디지?'


한동안은 잠을 깨면 예전의 집과 헷갈렸다. 그런 경험들 있지 않나? 여행 가서 깨어보면 당연 집이겠지라고 생각하다가 잠시 후 낯선 분위기에 화들짝 놀라는 상황. 그제야 '아, 여행 왔지..'라고 안심하고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상황말이다.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적응하는 단계에서의 소란 같은 거다. 


따지고 보면 무서운 게 두 가지 있다. 잠들 때와 잠에서 깨어날 때다. 말똥말똥하던 나의 의식을 한순간 집어삼킨 다음, 다시 원래대로 뱉어낸다. 깨어나는 순간에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른 세상에 한눈을 팔았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잊었던 나를 기억해 내는 과정이다. 간혹, 잠에서 깰 때 불쾌하게 깨어날 때도 있다.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서다. 어쨌든,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고,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를 쥐락펴락하는 무서움이다. 어쨌든, 잠들고 깨어날 때는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루 이틀이 지나며 그 거대한 동물들이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이 생겼다. 걱정거리가 해소되자 입맛이 돌았다. 대팻밥처럼 마른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몸에 대한 자신감은 여행에 대한 욕망을 일으켰다. 영역동물답게 점점 터전을 확대했다. 본격적인 여행은 오후에 시작된다. 그때가 되면 다들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침에 아들집사와 누나집사는 직장을 나가고, 오후에 할머니 집사는 노인정을 간다. 이때부터가 나의 비밀스러운 삶이 시작된다. 누구나 비밀스러운 거 있지 않나? 아들 집사도 퇴근을 하고 밤늦게 산책을 나가던데.. 할머니 집사는 왜 하필 밤에 나가냐고 하지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저마다 남이 짐작도 못하는 생각과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  남몰래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누군가를 해코지하는 상상을 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자살을 꿈꾸거나, 소설이나 시를 써보거나, 간혹 눈물을 흘리는 거. 아니면 자기만의 내밀한 규칙이든, 일종의 의식 같은 거 말이다.


나에게 비밀스러운 삶은 여행이다. 이 여행은 도로나 뱃길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병에 맺힌 물방울처럼 중력에 의해 미끄러져 내려가면 그만이다. 제삼자가 보면 나의 여행을 미로 속의 쥐 같다고 할 수도 있다. 인정한다. 몇 번 벌집 같은 집안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으음, 신발장에서 한번, 누나 서랍장 밑에서 또 한 번, 거실소파 뒤편에서도 길을 잃었다. 그렇다고 불안하지는 않다. 마치 놀이동산에서 길을 잃은 거랑 비슷해서 외려 흥분된다. 그런 흥분은 의외성을 포함하고 있어 여행의 본질에 맞다. 흔하게들 여행의 목적을 얘기하는데 목적 없이 떠나는 게 여행의 진면목 아닌가? 어딘가에 도착하기 전,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아무 데나 없는 '틈새'같은 어느 지점에서 마주친 잔잔한 충격. 그 충격이 여행의 의미이다.

  

나의 여행을 거시적 관점으로 말하면 몇 개의 방, 거실,  화장실, 세탁실, 베란다, 현관 등이지만, 미시적 관점으로 말하면 한참을 얘기해야 한다. 옷장 하나만 보더라도 벌써부터 설렌다. 무료함을 달래 주는 물건들. 다양한 옷걸이에 걸린 치렁치렁한 옷들과 다양한 색과 길이의 스카프와 가방, 갱도 같은 쇼핑백, 숨기에 제격인 반쯤 열린 서랍, 몸을 떠오르게 하는 쿠션.. 놀 거 천지다. 그러다가 지치면 컴퓨터 키보드 위에서 휴식을 취한다. 쿠션감도 좋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심심해서 키보드를 누르면 뭔가 바뀐다. 어떻게 네모난 곳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오는지, 이게 무슨 일이냐고 야옹거리며 뒤편을 살피다가 뭔가 뜨거운 시선을 느낀 적도 있다. 갑작스러운 아들집사의 등장에 그의 시선과 허공에서 부딪쳤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화장실에서 마음에 두었던 그녀와 맞닥뜨렸을 때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이었다. 이 상황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아, 그러고 보니, 컴퓨터와 비슷한 것이 거실에도 있다. 차이는 벽에 걸려 있고 크다. 커다란 검은색 발광체에 조그만 직사각형 물체로 무기를 꺼내 들듯 쏘아대면 하나의 빛과 소리는 죽고, 새로운 빛과 소리가 탄생한다. 수많은 죽음과 탄생 끝에 내가 좋아하는 게 나오기도 한다. 하나의 동그라미를 사이에 두고 아주 작은 사람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뛰어다닌다. 아들집사의 호흡이 빨라지고 흥분한 에너지의 파동이 느껴진다. 나도 몸이 들썩이며 동그란 것을 향해 몸을 날린다.


다만 아직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곳은 할머니 집사 방과 베란다이다. 항상 문을 닫아놓는다. 아직까지도 할머니 집사의 시큰둥한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쌀쌀맞은 게 딱 시베리아 북풍이다. 냉담한 마음을 풀 수 있을까 하고 할머니 집사에게 살갑게 다가가 다리를 휘감고 '갸르릉' 목을 울리며 이야기를 붙여보지만 어림도 없다. 한번 발 앞에 알랑거리며 자빠져볼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을 고쳐 먹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행위는 품위 없는 짓이다. 하기야 가족들에게 "차라리, 강아지를 키우던지 하지. 팔자에 없는 고양이라니"라고 말하는 걸 보면 아직은 툴툴거리고 칭얼대 봐도 소용없다. 할머니 집사가 고양이를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하는 거는 자유지만 비교당하는 게 달갑지는 않았다. 문득,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게 기억난다.


강아지의 생각 :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에게 나는 신이 분명하다.


우리를 설명하기에 딱 좋은 말이다. 강아지가 복종을 좋아하는 반면에 고양이는 자유를 좋아하는 독립적인 존재다. 뭐, 할머니 집사도 언젠간 변하겠지. 모든 만남에서 변하지 않는 게 있을까? 다만, 그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지. 


2.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영혼의 안내서인 전도서에서 당신은 하늘 아래 무엇이나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고,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으면 돌을 거둘 때가 있고, 안을 때가 있으면 멀리 할 때가 있고, 찾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고, 지킬 때가 있으면 버릴 때가 있고, 찢을 때가 있으면 꿰맬 때가 있고,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 있다는 말이다. 인정한다. 아비와 어미도 그때,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맺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도 분위기와 타이밍이 성공의 열쇠이다. 적절한 순간, 적절한 장소에서 감정의 교차가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위대한, 기적 같은, 운명의 사랑이 별거더냐. 시간과 공간의 우연의 배열 속에 돌발적으로 맞아떨어진 거지.


두 달이 지나자 거의 모든 곳을 여행했지만 지겹지는 않았다. 일상이 여행이고, 여행이 일상인 생명체에겐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여행지다. 다만 할머니 집사방과 베란다는 고즈넉이 바라반 볼뿐이다. 그곳은 늘 똑같은 한쪽면만 보여주는 달이자, 자욱이 안개 낀 섬과 같은 곳이다.


이젠, 여행의 발걸음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뒤뚱거리며 천천히 걸었고, 다음에는  천천히 빠르게 걸었고, 그다음에는 빠르게 걸어 다녔다. 음악으로 말하면 라르고(Largo)에서 안단테(Andante)로, 다시 알레그로(Allegro)로 바뀌었다. 기분이 좋으면 온 집안을 프레스토(Presto)로 우다다 뛰어다닌다. 웬만한 곳은 뛰어오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망신살 뻗치게, 품위 없게, 침대모서리에 죽기 살기로 발톱을 세우고 간신히 매달리거나 체력적인 한계와 눈대중으로 착지점을 잘못 계산하여 공중에서 헛발질하며 추락했던 내가 아니다.


3. 베란다에 나간 날, 머릿속 세상


그날도 모두가 사라진 오후 무렵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라르고풍으로 아주 천천히 도도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두를 것이 없는 나른한 오후의 산책이라고 보면 맞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전과는 사뭇 다른, 차갑지만 신선한 공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 파동을 자연스레 따라가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무심하게 이끌려 간 곳은 베란다였어. 정신없는 할머니 집사가 여느 때와는 달리 베란다문을 열어둔 채 노인정을 간 거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잰걸음으로 베란다로 다가갔다. 쏟아지는 빛에 동공은 줄어 문틈같이 세로로 길게 벌어졌다. 베란다 안과 몰래 내통한 차가운 바람은 얼굴에 댄 찬 수건처럼 차갑디 차가웠다. 털은 한쪽으로 쓸리고 수염은 휘청거렸다. 천천히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자 선뜩한 찬 기운이 활기를 주었다. 신경 세포는 전기자극이라도 받은 듯 번쩍이고 이런저런 원색적 충동이 이쪽저쪽에서 튀어 올랐고, 갖가지 영상들이 머릿속에서 북적였다. 잠시 열린 창문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주변에 보이는 것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그리고 냄새들. 미세한 공기의 진동에도 대자연의 위대함이 뒤섞여 있었다. 실로 이어진 장난감 전화기처럼 바깥의 파동이 즉시 내게 파동을 전달했다. 다양한 생명체의 속삭임, 떨림, 숨소리, 각각의 언어로 혼란스러웠다. 의심의 여지없이 대지는 살아 있었다. 마치 촘촘하게 쳐진 거미줄에 걸린 나방의 처절한 몸부림이 거미의 온몸에 전율처럼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 파동은 연이어 다가와 해안에서 부서지는 파도처럼 온몸을 자극했다. 동시에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내 느낌을 이해하기 힘들면 그나마 당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냄새를 생각해 보면 된다. 냄새만 하더라도 당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의 정보가 있다.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오는 순간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냄새 때문이다. 딱히, 무슨 향이라고 설명은 못해도 다른 집에서 느끼지 못한 향기가 난다. 낯선 집은 익숙하지 않은 냄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런 기분의 진정이나 경직됨외에도 냄새는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길거리를 걷다가 어떤 냄새에 과거의 기억으로 머릿속이 휘젓기도 한다. 


아름다운 향기를 위해 여인들을 죽여 향수 제조에 이용하고, 그 향기에 매혹된 사람들에게 뜯어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소설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냄새로 사물을 구별하고, 냄새로 세상과 소통했다. 체취가 곧 존재임을 말하는 이야기다. 공감한다. 삶은 숨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숨으로 끝난다. 호흡할 때마다 자연스레 냄새를 받아들인다. 매 순간 후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 그건 말이 전할 수 없는 진실한 순간이자 냄새를 통한 공감의 형태이다. 이 집에서도 다양한 냄새가 난다. 김이 빠진 커피 향, 희미한 담배연기 향, 자몽의 시큼하고 싱그러운 향, 눅눅하고 무게운 젖은 빨래 향, 다 타 버린 양초향, 휘발유와 화장품 향이 뒤섞인 매니큐어 향, 알싸한 오일 향, 단맛이 배어있는 귤의 신선한 겨울 향들이 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라고 조바심치는 인간이 있을 거 같다. 이제 다 되었다. 여하튼 냄새만 해도 당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이라는 것을 설득하고 싶어 좀 길게 얘기했다. 어쨌든 냄새, 밖과 내통한 공기의 파동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편안한 옷을 입은 듯, 나의 본성에도 워낙 잘 맞았다. 그 감각의 영역 안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생명체에서 발생한 파동과 옛 기억이 혼재되어 머릿속을 들쑤셔놓았다. 어떤 초현실적인 장소에 와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이내 찬란한 자연의 소음은 옆으로 밀리고 가족들에 대한 기억들이 밀려왔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했다. 순간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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