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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Sep 30. 2023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겠지, 뭐.'

<5화>


첫날은 정말이지 살얼음을 밟는 기분이었다. 전혀 다음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고, 혹시나 그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시변통으로 만든 잠자리에 나를 내려놓았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문이 빼꼼 열린 옷장이었다. 벌건 장소보다는 어둡고 후미진 곳이 필요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신기하게 내려다보는 괴상하고 놀라운 동물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고, 둘째는, 쓰다듬는 미끈한 손길을 벗어나고 싶었고, 셋째는, 그들은 다가오려고 하지만 내입장에서는 호랑이 꼬리라도 잘못 밟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되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간이란 동물은 괴상하게 생긴 게 맞다. 미끈한 얼굴과 손에다가 납작한 귀는 뺨에 붙어있지를 않나 게다가 꼬리도 없이 몸을 수직으로 펴고 두 발로 불안하게 걷는다는 게 괴상하다.


여하튼 구석진 옷장을 향해 뒤뚱거리며 냅다 뛰었다. 바닥은 흙이 있는 풀밭이 아니라 빙판길처럼 미끄러웠다. 하마터면 나자빠질 뻔했지만 스케이트날처럼 발톱을 세워 바닥을 긁었다. 휘청거리던 몸은 평형감을 되찾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옷장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내 모습은 달팽이가 제 집에 웅크리며 촉수를 거두는 듯했을 거다. 어두운 옷장 속을 막무가내로 파고들자 그들은 체념하듯 사라졌다. 옷장 속에서 그들의 끔찍한 냄새를 지우기 위해 몸을 연신 핥았다. 앞다리를 번갈아 핥다 치켜들어 얼굴과 귀를 비비고, 오른쪽 다리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배를 핥았다. 할짝할짝 핥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자, 형아 생각에 목이 메었다. 그리고는 잠이 와락 몰려왔다. 긴장이 풀린 거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지러운 꿈에 깼다. 마치 갓길에 차를 세우고 불안하게 잠을 자고 일어난 듯 찌뿌둥했다. 웅크리고 앉아 귀와 수염과 꼬리를 움직이며 주변의 소리와 진동을 느끼고, 코를 들어 이쪽저쪽 조심스레 냄새를 맡았다. 그들의 음성과 발소리의 진동, 숨소리의 미세한 진동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도 잠시동안 잠자코 있었다. 뭔가 뒤에서 새로운 음모를 은밀하게 꾸미고 있을지 몰라서다. 동정을 살피는 동안, 끔찍한 정적이 반가울지는 미처 몰랐다.


정적의 순간, 그동안의 일을 되짚어보았다. 어째서 내가 이런 신세가 된 걸까를 생각하다, 실컷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참았다. 울음이 그치고 나면 스스로의 꼴이 우스울 거 같기도 하고, 고양이의 품위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서다. 설령, 누가 내 처지를 듣는다고 해도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겠지만, 장황한 설명에 몰래 하품하다가 따분해 미칠 지경이 될 것이다. 물론 집중해서 듣는 이도 있을 것이다. 자신들보다 더 상태가 안 좋다는 말이 그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런 묘한 만족감에 결백하지 않음을 밝혀둔다. 


뒤죽박죽으로 걸려 있는 옷들 사이로, 사진사가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쓴 체 카메라뒤에서 번쩍이며 플래시를 터트릴 자세로, 옷장 밖을 슬며시 보았다. 아직도, 그들이 신기한 듯 내 주위를 기웃거릴 거 같아서다. 그들을 다시 본다면 오금이 저릴 것이다. 그러다 조심스레 살피며 옷장 밖으로 나왔다. 무심결에 앞다리를 세운 채 멍하니 창문을 올려보았다. 백묵 같은 햇볕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햇볕 속에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먼지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넋 놓고 보다가 잡으려 발돋움 쳐보았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예전의 삶에 대한 회한이나 혼자라는 쓸쓸함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일어나지도 않을 최악의 순간을 생각하며 불안감에 떨고 내 처지를 한탄만 할 수 없다. 어쨌든 덫에 걸려 빠져 나갈 수 없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족의 생명을 빼앗기도 하지만 설마 하니 한 끼 식사거리도 아닌 나를 끓는 물에 집어넣거나 인간의 질병을 테스트하기 위해 병균을 주사하거나 화풀이의 대상으로 아파트밖으로 던져버리거나 그들의 방한복을 만들기 위해 데려오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믿는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기력을 어딘지 모를 곳의 배수관을 통해 우악스럽게 빠져나가도록 해서는 안된다. 머리가 이제야 실용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지속성. 역동성. 지속성과 역동성. 물론, 역동성을 가진 지속가능한 삶을 원한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한 역동성과 한 곳에 뿌리를 굳건히 내리는 지속성. 일단 지속성에 무게중심을 두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 지속성을 위해 필요한 방어기제들을 생각해 보았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할지, 모든 것을 못난 내 탓으로 돌리거나 무심하고 무능한 부모탓으로 돌릴지, 위험천만한 숲보다는 아늑한 이곳이 낫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할지, 아니면 만만한 대상을 찾아 책임을 전가시킬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욕구나 충동을 억제하는 금욕을 통해 해소할지를 생각했다. 생각 끝에 얻는 결론은 유머이다. 불안을 농담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이런 보호막이라도 없다면 아마 내 심장은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유머라는 갑옷과 방패로 감싸며 당분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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