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이 Aug 04. 2023

마라톤 도전기

2009년 한강 마라톤

아내는 가끔 내게 "당신은 진짜 무서운 사람이야."라고 얘기한다.


특전사에서 10년간 근무했지만 사실 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체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특전사라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체력만을 간신히 유지했을 뿐이다. 그런 내가 단 한 번의 연습이나 훈련 없이 마라톤 풀코스를 뛰었으며, 평소 자전거 안장에 앉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서울 ~ 부산 자전거 종주까지 성공했으니 아내 입장에선 나의 그 무모함과 무식함이 꽤나 무섭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아내와의 러브스토리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했던 때의 기억이다.

 

11공수특전여단에서 팀장 보직을 마치고 특수전 교육단(현 특수전 학교)으로 전입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일과를 마치고 가볍게 운동이나 할 생각에 밖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직속상관이셨던 전술학처장님(중령)과 전술학처 행정보급관(원사)이 걸어 나오시더니 내 옆에서 몸을 푸신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치신 전술학처장님은 내게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난 마라톤이 취미인 전술학처장, 행정보급관과 함께 달리기를 시작했다.


당시 부대의 달리기 코스는 1바퀴가 대략 5km 정도였다. 무자비한 속도로 내달리는 처장님의 옆에서, 처장님의 모든 질문에 답을 해가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두 세 차례 서고 나서야 그 5km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처장님이 꺼내신 한 마디! "한 바퀴 더?" 이제 갓 전입 온 대위 나부랭이가 차마 "아닙니다."라고 할 순 없었다. 그렇게 두 바퀴, 10km를 달리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버텨준 심장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고생했다. 심장아!'


처장님은 달리기를 마치고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시며 행정보급관에게 "이 녀석 잘 뛰네. 이번에 부대에서 단체로 참가하는 마라톤 명단에 포함시켜."라고 말씀하셨다. [2009년 한강 마라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마라톤 풀코스 도전은 이렇게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다음날 행정보급관은 내게 1달짜리 마라톤 훈련 계획표를 건네며 "담배는 피우더라도 술은 절대 안 됩니다. 술 마시면 절대 완주 못합니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1달 동안 '금주'만 했을 뿐 마라톤 훈련은 하루 만에 때려치웠다.


드디어 마라톤 대회 당일, 어떠한 훈련도 하지 않은 최상의 몸 상태로 대회에 참가했다. 대회에 참가한 모든 부대원들은 내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었지만, 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출발 신호와 함께 아무 생각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10km 지점에 도착했다. 아직까진 몸 상태가 괜찮다. 이 정도면 끝까지 달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은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음료대 주변에서 물을 마시며 쉬고 있다. 난 속으로 '아니 뭐야? 벌써 힘든거야?'라고 그들을 비웃었다.


20km 지점이 다가온다. 다리가 슬슬 무거워지고 골반이 뻐근해짐을 느낀다. 난 음료대에 일단 멈춰 섰다. 그리곤 연거푸 물과 음료를 들이켰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벌써 반이나 뛰었다. 아까워서 안 되겠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30km 지점이다. 난 일단 음료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내게 다가와 물과 음료, 바나나와 초코파이를 건넨다.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눈물로 내 피 같은 수분을 낭비할 순 없었다. 그저 바나나와 초코파이를 씹어 먹으며 더 달라고 불쌍한 눈빛을 보낼 뿐이다.


난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30km를 지나고부터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을 반성하고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수십 번이나 했다.


마지막 40km 지점이다. 잠시 멈춰 생각에 잠긴다. 조금만 더 가면 부대원들이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 앞에서 지금처럼 절뚝거리며 뛰는 내 모습을 보일 순 없다. 마지막에 멋있게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때까지 걸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남겨둔 힘을 짜내어 그들에게 뛰어갔다. 주변에선 난리가 났다. 연습 한 번 안 하고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미친놈이라며, 대단하다고 다들 한 마디씩 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최종 기록 4시간 30분!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마라톤 도전! 성공한 것인지, 실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가 지금껏 내 자랑질 시나리오의 첫 페이지를 장식해 온 것만은 확실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날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