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의 첫 여행 이후 아내와 난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매일 저녁 데이트를 즐겼으며, 주말엔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자주 다녔다. 다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은 부대에 근무하며 연애를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부대에 소문이라도 나면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도 봐야 하니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것이다.(실제로 부대에서 사귄다는 소문이 난 이후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말들로 가슴앓이를 한 커플을 자주 보았다.)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교제한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로 하기로 했다. 때문에 데이트는 항상 부대 밖에서 했으며, 부대 안에서 마주치더라도 살짝 윙크 정도만 할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연애, 아내와의 연애는 언제나 스릴 넘치고 재미있었지만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각자 차를 타고 부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으며, 데이트 이후에는 또다시 각자의 차를 타고 부대로 복귀했다. 부대 식당이나 복도에서 마주치거나, 운동 중 우연히 만나더라도 서로를 의식하며 피해 다녀야 했다. 하지만 당시엔 그 불편함마저도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아내와 예쁜 한정식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부대로 복귀하는 길, 초행길에 평소 길눈이 어두웠던 난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유턴을 하기 위해 잠시 차를 세웠는데 불빛하나 없이 너무나 깜깜한 곳이었다. 난 기회다 싶어 뽀뽀라도 하고 가자는 음흉한 생각에 시동을 끄고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내는 은근슬쩍 얼마 전 둘만의 첫 여행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때 왜 갑자기 밖으로 나갔냐"는 아내의 질문에 난 "혹시라도 당신이 거부한다면 두 번 다시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그랬다"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내 대답이 귀여웠는지 살짝 미소 짓더니 여자가 남자와 단 둘이 모텔방에 갔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 아니겠느냐, 거부할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방을 두 개 잡지 않았겠느냐는 뉘앙스의 얘기를 했다. 그렇게 즐겁게 웃으며 그때의 얘기를 나누던 중,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도망 안 가고 잘해볼게!" 그날 아내와 함께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날 이후 밤마다 아내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어느 날, 난 여군 숙소에 침투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미혼 남군들은 부대 안에 독신 숙소가 있었고, 미혼 여군들은 부대 밖 군인아파트 1개 동을 독신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에도 남군이 여군 숙소에 출입하는 건 이유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최하 경징계 처분은 받을 것이고, 진급은 커녕 전역을 권유받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내게 그런 것들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두려움도 없었다. 내겐 지금 당장 아내와 함께 있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결국 새벽 1시쯤 술을 한 잔 하고 아내에게 집으로 갈 테니 문을 열어 놓으라고 전화를 했다. 그리곤 아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여군 숙소 근처에 도착한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새벽시간이라 다행히 마주친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본 나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여군 숙소 1층 현관문을 열고 아내의 숙소가 있는 3층까지 바람처럼 뛰어 올라갔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마치 야생 들고양이 같았다. 다행히 아내의 방문은 열려 있었고 그렇게 아내의 방에 침투하여 밤을 보내곤 새벽 5시에 일어나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후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하지만 마약에 중독된 듯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고,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랑의 힘은 참 대단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