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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와 나 -7

인간과 개의 차이

by Younggi Seo


학교는 아이들의 개성을 사회적으로 거세하는 임무를 위하여 세상에 나타났다.

- 황석영, ‘개밥바라기 별’에서




재수를 실패하고 나서야 수능도 암기에 능해야 잘 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수학도 결국에 기출문제 유형을 깡그리 외우고, 개념에 익숙해져서(이것이 장기기억화 되기 위해 시일이 걸리면) 여러 개의 개념이 섞여 새로운 문제로 나와도 당황하지 않고 손이 먼저 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무원 수험도 이해를 전제로 준비하면 2, 3년은 기본이라는 것을 들었다. 토익도 자타 공인 전국 수강율 1위 강사가 외운 대로 풀지 않고, 해석부터 들어가면 고득점은 힘들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국사회에서는 암기 지향적인 공부가 다들 알지만 나쁘다고는 보지 않는다. 토익도 이제 900점 이상이면 영어로 입은 뻥긋 못해도, 성실성의 척도로 보기 시작했다니...



위에서 언급한 시험은 대한민국 교육과 취업 시국에서 아직도 네가 옳니, 내가 옳니 하며 티격태격하는 난관들의 시험만 읊은 거다. 그런데, 사실 대한민국에서,



누가 창의적인 생각 좀 한다고 서울대 쉽게 간다고 말할 수 있나?

(누가 서울대에서 A+를 받는지는 해당 글귀의 책을 보면 여전히 그들은 맹목적인 암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 교육을 육상 레이스에 비유해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말이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수능은 장기 레이스니 지금부터(초등학교 1학년) 코치님이 말하는 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달릴 때 그것만을 떠올리면서 달려야 합니다. 심지어 제가 호흡하는 리듬과 어디서 숨을 참고 내뱉아야 할지도 그대로 따라 해야만 결국 이 긴 승부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좋다. 일단 말씀 한 번 믿고 그대로 연습하니, 결과는 옭거니 합격 선이다. 이 레이스는 비단 한국만이 펼치는 종목이 아니지 않은가. 나라마다 선수들이 있고 그들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격전이 펼치지고 있을 테고, 또 한 번씩 세계 올림픽이 있으니 모든 나라가 참가해야겠지. 그런데 한국 선수는 지도받을 때 코치가 장기 레이스라고 주지해주셔서 마라톤 종목이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회에 참가하니 한국은 100m는커녕 50m 레이스에만 페이스를 잃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수준이란다. 그래서 있지도 않는 50m 종목만 경쟁할 자격이 주어졌다(이 비유와는 별개로 한국은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이 가장 높기도 하다.).



수능이라고 학생들의 머리에서 자극되는 부위가 좀 더 유연하며 창의적일 뿐만 아니라, 통합적인 사고까지 하기 위해 전뇌를 골고루 많이 사용하리라 기대했지만, 수능 만점자는 실제로 수능 꼴찌보다 경험을 통해서만 늘릴 수 있는 절차적 지식에 대한 사용법에 대해서는 후달렸다. 이 EBS의 영상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점수를 일자로 나열해서 순위를 매기는 것은 비단 한국만의 교육평가 방법만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획일적인고 간단한 평가 방식을 지양하는 국가(핀란드)도 있다는 거다. 이 핀란드는 전 세계 학업 성취도 평가에서 항상 1, 2위를 한다. 그렇다고 그런 국가를 답사한다고 기존의 획일적 교육방식이 처방되어 전인 교육이 이루어질 리도 만무하다. 왜냐하면 한국은 미국을 가장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바로미터를 찍는 산실이기 때문이다. 미국? 역으로 한국의 옛날 오륜 사상과 예절을 실천하는 교육을 전파한 미국의 한 중등학교에서 아이비리그(미명문대가 밀집한 동부 대학가) 입학을 많이 시켰다고 선전하는 나라다. 이 나라, 일 년에도 수백 명씩 총기난사 사건으로 천국이든 지옥이로든 실려 가는 나라다. 돈 내놔라고 유튜브 본사까지 찾아가서 구내식당에서 총 쏘는 나라다. 70, 80년대의 서부 영화가 아니다.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호러 작가인 스티븐 킹이 쓴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도입부를 보노라면 이 작가, “악어 아냐...”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1800년대 러시아, 니콜라이 1세 차르의 지시로 서유럽의 자본주의를 러시아 토착 민족주의 이념인 슬라브주의 대신 새로운 강국의 이념으로 받아들이는데 지식인들의 행동을 촉구했었다. 아니꼬운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소설에서 밤거리를 지나가는 처자를 돈만 있으면 언제든 자신의 욕망대로 행하는 인간 군상의 심리를 묘사했다. ‘죄와 벌’에서. 미국의 스티븐 킹보다 거진 200년은 앞서서 인간의 변연계와 그 안의 파충류 단계의 뇌를 자극시키는 소설을 썼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더욱 부채기겠지만 고상한 이념으로 아는 체하는 식견과 역설적으로 그러한 교양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인간을 묘사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독백을 하는 주인공처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라는 기독교를 반신반의하는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20세기 러시아의 계몽이 덜된 소작농들이 기독교와 신에 대해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모습을 한 번 더 비꼬았다. 도스토옙스키, 자신은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고 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간은 그 고상한 이념(자본주의를 비롯한 서구의 이데올로기)에서 진리를 찾기보다는 자신의 토착문화에서 본질을 찾으려 했다. 왜? 자본주의는 유혹하고 그 유혹에 혹해서 자신의 뇌(변연계와 감정을 표출하는 부위)를 잘못 사용하면 강자에게 먹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를 옹호 하련 참이 아니다. 아까 말했듯이 돈 안주냐고 실리콘밸리의 유튜브 대표도 아니고, 거기 사내식당에 가서 총을 난사하는 곳이 자본주의의 단편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라는 공리주의보다는 일단 내가 잘살고 두고 봐야 하기 때문에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이라는 표제어는 사치일 수도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공리주의 역시 고상한 헛소리라고 했지만 말이다. 여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개가 잠식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의 뇌의 욕구대로 사는 평범한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미스터 트롯’이라는 오늘 밤에 시청한 한 오디션 엔터테인 방송에서 뭇 남성들이 심사를 하는 이들의 눈(후두엽) 그리고 본능(변연계 안쪽의 기저핵이나 시상부 골고루)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라면 웃통 정도 벗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본능이 충족되지 않으면 어떠한 자아실현도 이룰 수 없다. 적어도 한물간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의 아래 계층도에 따르면 말이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 다이어그램. 아래로 갈수록 원초적인(신체적, 파충류 단계의 뇌의)욕구를 나타내는 피라미드로 나타내며 항시 아래 것이 충족되어야 위의 욕구도 갈망가능하다는 이론.



누군가 엄청난 성공과 부를 거머쥐게 하기 위한 교육에 대해서 ‘에이트’의 작가 이지성은 “앞으로 조만장자가 부자로 도래할 시대에서는 기존의 강의식 교육은 조만간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하버드는 몇 년 내에 의과대 수업을 없앨 거라 하였고, 예일대나 MIT(매사추세츠 공대)도 온라인으로 이미 세계에 무료로 강의를 배포하고 있다. 심지어 요즘 주가가 중국 덕에 치솟은 테슬라 전기차의 괴짜 CEO, 일론 머스크는 자녀들의 교육을 자신이 만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단다.



어쨌든 성적지상주의를 넘어 경쟁력만을 최고로 여기는 미국 자본주의 시장을 답습하는 한국의 교육에 대한 비판은 어제, 오늘 그리고 본인 일개의 소리가 아니다. ‘제3의 물결’로 국내에서 잘 알려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지적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이 책의 챕터 #1 참조). 20세기가 가고 밀레니엄 시대의 서막에 도스토옙스키도 기대하지 않았던 세상의 종말은 안 왔지만, 21세기에 아직도 20세기에서나 필요한 교육만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고, 마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아버지 표도르처럼 장로를 붙들고 진절머리 나게 들러붙을 필요는 없다. 그래 봤자 물고 물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길러지는 인간들은 자신의 뇌의 숨어 있는 욕망을 쪼대로 못해먹어서 몇 날 며칠을 눈만 뜬 채 제할일을 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왜 21세기에 미국에서 인기가 가장 높은 문학으로 선정되어었는지 모르겠다. 인내심이라면 나만큼 없으니 하루 걸러 총기난사를 릴레이 하는 미국인한테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만연체(독자들에게 제일 짜증 나게 하는 긴 문체 아닌가? 그런데 필자는 이 만연체를 나의 스타일의 하나로 잘 쓰고 싶다(?))를 좋아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나를 통해서 알 거 같다. 필자도 성격이 불같이 급한데, 아닌 척하는 게 남들과 지내는 일상의 대부분을 잠식한다. 이게 문제다. 아닌 척하는 거 말이다. 이러면 자본주의처럼 고상한 척하면서 뒷구녕으로 할 거 다 하게 된다.



이것이 전 인류가 변연계 밑단의
파충류 단계의
뇌(싸움, 섹스, 수면, 배설욕, 식욕을 조절하는 부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고 살지 않으면 언젠가 충동적으로 ‘앞구녕’에서 일 저지를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니, 21세기에도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본능에 대해 역으로 근본(“인간아, 나란 무엇인가?” 파충류, 포유류, AI?)을 캐묻게끔 하는, 즉 그의 작품 의도와 구성을 재탕, 삼탕 하는 예술가(이를테면, 봉준호 감독이나 작가 한강)들이 계속 우리의 변연계보다 깊숙한 뇌의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대리 만족시켜줄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왜냐면 소시민들이 대놓고 개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미국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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