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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Sep 19. 2020

언제까지라는 부차한 것들에 대한 단상

과연 일리 있는 말일까?

 


신랑 김 OO군과 신부 정 OO양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코로나 바이러스 단계가 격상되는 가운데에도 요즘 심심치 않게 주변에 결혼하는 지인들의 소식을 접한다. 인공 지능 시대가 도래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을 너무 쉽게 재단화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죽기 전까지의 나를 상상하며 아직 반백년도 안된 삶에 대해 단편화하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가 십 년간 어떻게 살지는 오늘 같은 하루를 3650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같은데 왜 그 3650번에 대한 확률을 단 하나의 결과론으로 획일화시켜서 말하는 걸까? 3650번의 일상을 초지일관되게 사는 것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3650번의 나의 일상을 단 하나의 성과지표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얼토당토 하지도 않다.


단지 오늘 하루라도 본인이,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해 한 번 내딛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열정을 불사르는 게 반드시 어느 한 곳에서만 죽어라 할 필요가 있을까이다.


단 하루라도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았다는 증표를 자신에게 남기는 것이 오히려 뭉뚱그려서 하나의 지표로 남긴 삶보다 본인에게는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삶에 대한 의미와 자신에게 남겨질 그 기억에 대한 단 하루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성찰을 왜 요즘 시대에서는 이토록 하기 힘든 것인가? 말년이 그렇게 두려운가? 그래서 여유자금만을 남기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 자신이 진정으로 구가하고자 하는 삶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순위로 미루는 게 현대사회인가? 이것에 대해 정부는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OECD 회원 국가들 중에 여덟 번째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부유층 상위 1%만을 제외하곤 평생을 남보다 더 잘살고 못살고 하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못 헤어 나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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