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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학 Sep 12. 2021

결국 성공한 회사의 전쟁 같은 과거사

크래프톤 웨이 / 이기문

오랜만에 정말 재밌게 읽은 책. 경영서적이라는 게 이론을 정리한 내용이거나, 창업자가 자기 회사 이야기 정리한 내용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창업가가 아닌 사람이 특정 회사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다는 점에서부터 흔하지 않은 책. 특히 원서 번역 말고 우리나라 책 중에는 이런 책이 있을까 싶다.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 책이라 인사이트 위주로 요약하긴 어렵고 인상 깊었던 키워드 몇 개 정리해 보았다.



고생

이 책을 처음 주문할 때는 초창기의 어려움이 한 2~30%, 배틀그라운드 대박이 터진 이후의 회사 조직문화에 대한 내용이 나머지일 거라 생각했다. 책 제목이 크래프톤 '웨이'이고, 각종 홍보 문구들이 배틀그라운드의 성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실제론 책 본문이 500 페이지 좀 넘는데 330 페이지쯤에 배틀그라운드 기획서가 잠깐 언급되고, 450 페이지쯤 가서야 본격적으로 배틀그라운드 테스트 이야기가 나온다.


그전까지는 줄창 망한 이야기만 나온다. 이 게임 망하고, 저 게임 망하고, 한국에서 망하고, 미국에서 망하고, 유럽에서 망하고, 중국에서 망하고. '이 회사가 어떻게 안 망하고 버티는 거지' 정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어떻게 안 미치고 버티는 거지' 싶은 수준이다. 1년에 직원의 절반이 퇴사하기도 하고, 공동창업자와 팀장급 핵심 인력들도 여럿 퇴사한다. 매출이 몇 백억 나오고, 직원도 몇 백 명 있고, 투자금도 백억 단위로 끌어오는 회사도 내부는 파산 오 분 전일 수 있구나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럼에도 한방이 있으니까 누군가는 투자하는 거구나 싶기도 하고. 


기록

고생한 내용이 이제 와서 미화되지 않고 그대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크래프톤이 회의마다 서기를 동석시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장병규 의장은 이에 대해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데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과거를 희미하게 기억하면서 서로 딴소리를 하게 마련'이라 보완책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이기문 기자는 이 기록과 김강석 前 CEO의 회사 이메일 내용을 뒤져보고, 크래프톤의 여러 임직원들을 인터뷰하면서 과거 10년을 파악해 나간다. 


이 부분에서 두 가지 생각이 났다. 하나는 레이 달리오의 브릿지워터. 모든 회의가 녹음되고, 전 직원이 누구나 들어볼 수 있다. 투명성을 워낙 강조했기 때문이다. 크래프톤도 비슷한 문화를 추구한 걸까? 모든 회의를 기록한다는 취지는 동의하는데, 크래프톤에서는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 였을지 궁금하다.

둘째는 이랜드. 10년 전 이랜드에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속기록'이라는 것이 있었다. 서기가 따로 있지는 않았고, 회의에 들어온 주임, 대리 들이 회의 내내 부지런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었다. 그래서 중요한 회의에는 서너 버전의 속기록이 나왔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모아서 보면서 여기서 빠진 내용을 저기서 보충하기도 하고, 경영진의 특정 발언이 어떤 맥락이나 뉘앙스로 한 말이었는지 유추하기도 했다. 지금은 회사 조직문화가 변하면서 속기록이 없어졌다. 아랫사람들이 속기하는 모습도 수직적인 문화로 보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회의 내용을 텍스트로 바꿔주는 인공지능 앱도 많은데 중요한 회의들은 다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전

블루홀은 'MMORPG의 명가'라는 비전으로 시작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MMORPG 제작사가 되겠다는 꿈으로 테라 개발을 시작한다. 그러다 테라 반응이 생각보다 시원찮고, PC 게임보다 모바일 게임이 커지는 세상이 오면서 '게임 제작의 명가'로 비전을 바꾼다. 여러 중소 게임사를 인수하면서 연합군을 이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전은 이미 두 번의 성공으로 수백억을 번 장병규 의장이 한번 더 창업한 이유이기도 하고, 어려운 시기에 직원들을 한 데로 묶어줄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 듯하다. 비전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비전보다 근무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직원들은 가차 없이 내보낸다. 하지만 시장이 바뀌고 회사 조직이 달라짐에 따라 비전의 문구는 바꾼다. 경영진은 비전을 매우 강조한 듯하고 책에도 여러 번 비전 이야기가 나오는데, 직원들은 비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실제로 진지하게 인식했는지 궁금하다.


소통

이 책에 보면 장병규 의장과 다른 경영진들이 수시로 전 직원 메일을 보낸 내용이 있다. 게임이 새로운 국가에서 오픈할 때도, 출시 성적표가 나왔을 때도, 주요 인재가 퇴사했을 때에도 누군가는 경영진이 이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는지 메일을 썼다. 정기적으로 BLT(블루홀 라이브 토크) 시간을 가지며 경영진들이 현재 회사 상황에 대한 발표도 하고 직원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에 답했다. 게임을 총괄하는 PD들도 주말마다 월요일 회의에서 팀원들에게 발표할 내용을 고민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경영은 실제 일어난 사건도 중요하지만 이에 대한 해석이 훨씬 중요하고, 맥락을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꽤 열심히 소통한 것 같은데도 책을 읽으면서 직원들이 경영진과 같은 페이지에 있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다. 남아있는 기록이 경영진 주변 위주여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회사 규모가 너무 커서 실제로 아무리 소통해도 부족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소통은 참 어렵다.


근태

장병규 의장이 취한 행동 중에 인상 깊게 본 부분이 근태 강조다. 회사가 한창 어려운 시기에 매일 같이 야근하던 개발자들에게 근태를 강조하고 10시까지 출근하도록 만든다. 나중에는 10시 기준으로 세 번 지각하면 퇴사라는 규칙도 만든다. 근태를 강조하는 이유로 세 가지 이유를 댄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끼리의 짧은 대화, 장기간 근면성을 유지하기 위해, 출근 시간이 달라서 생기는 어수선함이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에. '당부'라는 제목으로 전 직원 메일이 나갔지만 대부분 직원들은 '통보'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뒤에는 김형준 PD의 제안으로 유연근무제 도입을 고민한 부분도 있다. 금요일 3시 퇴근, 주말 하루 근무하는 대신 평일 하루 쉬기 등을 제안했는데, 회사 전체에 도입하지는 않고 김형준 PD의 팀에만 시범적으로 적용해본 것 같다. 크래프톤은 제작팀마다 PD의 방침에 따라 자율적인 근무를 하는 시기와 장병규 의장 주도로 근태를 좀 더 강하게 관리하던 시기가 왔다 갔다 한 것 같은데 책 내용만으로는 유추하기 힘들다.


책에는 근태에 대한 이야기가 꽤 자주 나온다. 아니면 내가 요즘 관심 있는 주제라 계속 눈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상황도 있고 재택근무를 늘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재택근무가 출근하는 날보다 더 많아졌을 때 팀의 문화라는 게 유지가 될까 걱정하는 편이다. 장병규 의장이 고민하던 포인트와 좀 다르기도 하고, 이 책에는 결론적으로 근태 관리가 회사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언급이 없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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