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영학 Jul 09. 2017

너와 나의 '감정계좌'

멀쩡한 상사를 악마로 만드는 법


이전에 조직을 말려 죽이는 마이크로매니저라는 글을 썼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는데, 몇몇 관리자 분들께서는 '마이크로 매니지가 좋지 않다는데 동의하지만 아무리 믿고 맡기려 해도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는데 어떻게 하느냐'며 고민을 토로하셨다.


오늘은 그런 분들을 위한 항변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편애하는 상사?


어느 날 당신이 상사에게 보고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XX 때문에 일정도 맞추기 어렵고, 결과가 썩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상사는 노발대발하며 이것저것 캐묻더니 같은 팀 동료 김 과장을 부른다.


'김 과장, 이거 좀 다시 자세히 보고 이야기해줘'


김 과장이 자료를 들여다보고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다. 그리고 상사에게 이야기한다.


'박 과장 말대로 이번 프로젝트는 XX 때문에 일정도 맞추기 어렵고, 결과가 썩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 과장이 봐도 그래? 쩝... 어쩔 수 없지 뭐 알았어.'


이건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 왜 똑같은 일을 두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저놈 말은 믿고 내 말은 말 같지 않게 받아들이는 걸까? 그런데 이런 일은 조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혹시 당신 자신도 가족들에게, 혹은 친구들에게 똑같이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너와 나의 감정계좌


우리는 모두 조직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직접적으로 같이 협업해야 하는 관계도 있고, 현업과 지원부서처럼 좀 더 느슨하게 엮여 있기도 하며, 아예 서로 다른 부서로 이름과 얼굴만 아는 사이 정도로 남기도 한다.


어떤 사람을 알게 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그 사람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성향이 있고, 결론적으로 이 사람이 믿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 우리는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한다. (이러한 성향을 종결욕구라 한다)


이런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감정계좌'이다. 우리의 마음은 은행과 같아서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계좌를 오픈한다 (존 윅에 나오는 그 계좌 아니다). 일단 계좌가 열리면 그 사람과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해당 감정계좌에 신뢰가 쌓이거나, 혹은 인출된다. 그래서 감정계좌에 신뢰가 많이 쌓여있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하면 '그런가 보네'하고, 감정계좌가 바닥난 사람이 '그렇습니다' 하면 '그래?' 하는 것이다.


즉, 상사가 팥으로는 메주를 못 쑨다고 해도 안 믿는다면 둘 중 하나이다. 그 상사가 팥으로 메주를 만들어 봤거나, 그 사람 안에 당신의 감정계좌가 마이너스 상태이거나. 감정계좌는 조직에서 '책임감'과 '주도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드러난다. 만약 당신의 평가 피드백에 저 두 가지 단어가 긍정적으로 나타난다면 당신의 감정계좌에 신뢰가 쌓여있다고 생각하면 되고, 반대로 저 단어들이 부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된다면 당신의 감정계좌는 잔액이 부족한 상태이다. 



감정계좌의 신뢰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감정계좌는 어떤 면에서는 은행계좌와 비슷하게 움직이는데, 다른 측면도 있다.


무언가 일을 맡아서 제대로 처리하면 감정계좌에 신뢰가 쌓인다


혹시 직장에서 '복사를 잘해서 임원까지 된 사람' 같은 전설을 들어 보았는가? 사소해 보이지만 상사가 시킨 일 하나하나를 깔끔하게 처리할 때마다 신뢰가 쌓인다. 반대로, 복사를 시켰는데 페이지가 누락되거나, 스테이플러 방향이 읽기 불편하게 찍혀있다면 신뢰가 조금씩 깎인다. 어르신들이 하찮은 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를 시키면 하나만 해오는 사람은 그 마저도 제대로 못하는 것보단 낫겠지만 상사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지시를 내려야 하는 사람이 된다. 팀원은 '시키는 일 다했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불만이고, 상사는 '시키는 일만 딱 해오면 어떡하냐'라고 불만이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신뢰가 매우 천천히 쌓인다. 시키는 일만 하기 때문에 '그건 시키신 적 없잖아요'란 말을 듣지 않으려면 상사 입장에서는 하나하나 다 챙겨서 지시할 수밖에 없다. 부하가 상사를 마이크로 매니저로 만드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부하는 상사가 미처 챙기지 못했거나 상사가 바빠서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 부분까지 알아서 챙겨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감정계좌에 신뢰가 기하급수적으로 쌓인다. 이러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이크로 매니지 할 필요가 없어진다.



감정계좌에 신뢰가 쌓여 있으면 잠시 신뢰를 대출할 수 있다


어려운 과제가 있어서 상사가 어떤 믿음직한 부하에게 그 일을 맡겼다고 하자. 중간중간 보고야 하겠지만, 상사 입장에서는 정말 잘 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할 수 있다. 그럴 때 신뢰가 쌓여있는 부하는 '제가 챙기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간 쌓여있는 신뢰를 담보로 더 큰 신뢰를 대출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대출이다. 상사가 직접 프로젝트를 들여다보고 여차하면 자기가 직접 맡아버리고 싶은 욕구를 일단 뒤로 미룬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프로젝트의 중간 결과물을 보여주고 신뢰를 갚아야 한다. 몇 번의 중간보고가 계속 상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상사는 빌려줬던 신뢰를 다시 회수한다. 감정계좌의 신뢰가 확 줄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마 상사는 더 잦은 주기로 보고하라고 시키고, 보고한 내용도 한 번 더 크로스 체크하려 들 것이다.


반대로 중간보고 결과가 상사를 만족시켰다면 감정계좌의 신뢰는 더욱 늘어난다. 원래 신용등급도 아예 신용거래를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용거래를 꾸준히 하지만 항상 제때 갚는 사람이 더 높다. 감정계좌에서 신뢰를 대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당신이 도전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때로는 자신의 역량을 조금 벗어나 보이는 일을 맡고 (신뢰를 대출),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야 (신뢰 상환) 신뢰의 대출한도가 늘어난다.



한번 쌓아놓으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상사와 일을 하다가 그분이 이동하시거나 본인이 타 부서로 전출될 수 있다. 그러다 몇 년 후에 다시 그 분과 같이 일할 일이 생겼다고 하자. 시간이 흘렀지만, 당신이 감정계좌에 쌓아놓았던 신뢰는 그대로 남아있다. 당신이 예전에 일을 믿음직스럽게 처리했었다면 그분은 여전히 당신을 신뢰할 것이며, 안타깝게도 그 반대도 성립한다. 감정계좌는 쌓아둔 포인트처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감소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이자가 붙어 저절로 늘어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송금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당신이 상사와 신뢰가 많이 쌓인 관계라고 하자. 어느 날 당신이 추천한 직원이 새로 입사 or 이동해 왔다고 하자. 그럼 상사는 그 사람과 감정계좌를 오픈하는데, 이 계좌는 처음부터 잔액이 0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입금된 채로 시작한다. 당신에 대한 신뢰가 당신이 추천한 사람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 것이다. 


좋은 점은 그 사람의 감정계좌에 당신이 신뢰를 송금했다고 당신의 계좌 잔액이 깎이지도 않는다. 안 좋은 점은 만약 당신이 추천한 그 사람이 상사에게 신뢰가 깎일만한 행동을 했을 때다. 이 때는 그 사람의 감정계좌뿐 아니라 당신의 감정계좌에서도 신뢰가 깎인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사람을 추천할 때는 당신의 평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감정계좌가 바닥난 것과 마이크로 매니저의 차이


감정계좌가 바닥나면 상사는 더 이상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상사의 원래 성향과 상관이 없다.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으므로, 당신만 마이크로 '매니지'를 받게 된다. 만약 상사가 유독 나에게만 꼬치꼬치 캐묻고, 하루가 멀다 하고 보고하라고 부른다면 당신의 감정계좌 잔액을 의심해보라.


반면, 마이크로 '매니저'란 원래 감정계좌에 신뢰를 쌓는데 인색한 사람이다. 이런 상사는 맡은 일을 항상 깔끔하게 처리해와도 신뢰를 잘 주지 않는다. 고장 난 atm처럼 입금을 거부한다. 두어 명의 부하들만 신뢰하고, 나머지 부하들은 도통 믿질 않는다. 


사실 이러한 상사와는 일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사는 어지간한 일을 해서는 신뢰를 쌓을 수 없고, 위에서 언급한 '신뢰를 크게 쌓을만한' 작전을 세워야 한다. 허들이 높기는 하지만, 역으로 어떻게든 이 분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범주 안에 든다면 그 사람은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밀어줄 것이다. 이 분 입장에서는 세상에 믿을 놈이 몇 없기 때문에, 자기도 일을 하려면 믿을 수 있는 몇 명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사람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면 주변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의 신뢰는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다만 당신이 너무 그분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부하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주변인과의 감정계좌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가? 혹은 유독 누군가의 감정계좌에 신뢰를 쌓아주는데 인색하지는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을 피드백할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