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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안 Sep 12. 2016

17 걸어도 걸어도, 마르카밸리 트레킹 4th day

Ladakh - India 7월 한 달의 기록 2016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텐트에서 나오니 날씨가 좋았다.


라다크의 7월은 매일이 최고의 날씨다.

유일하게 자연의 초록 초록함을 볼 수 있는 시기,

이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리 시원하고 다정한 라다크의 색을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비단 트레킹뿐만 아니라, 인도 여행 모든 순간의 날씨는 언제나 완벽했다.

심지어 분명히 우기였는데도 궂은 날씨는 묘하게 우리를 항상 비껴갔다.

더 좋은 추억 가져가라는 하늘의 배려 같았다.


오늘은 고도를 올리지 않는 대신 아주아주 오래 걷게 될 날이었다.



Markha (4,050m)   ---->   Hankar (4,050m) : 8-9 hrs





꼭지를 들어 올리면 물이 나온다. 손을 씻거나 양칫물을 받거나 한다.

누군가 빨간 비누를 갖다 놓았네. 머스크 한 인도향이 물씬 풍기는 비누였다.

아무도 물을 콸콸 쓰지 않는다. 내가 마구 쓰면 누군가는 못 쓰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모두 아껴서 쓰니까, 물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감은지가 꽤 오래되었고, 언제 샤워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것 정도?!



아침은 잔멸치 볶음, 땅콩조림, 김치 등등 내 입맛에 꼭 맞는 메뉴였다. 여기에 따끈하게 끓인 흰 죽 한 그릇이면 그냥, 끝난다. 간밤에 잠으로 채우고도 부족했던 하루치 걸을 힘이 빵빵하게 충전되는 순간!


역시 트레킹에선 밥심이다. 싸부가 특히나 중요하게 생각해서 여행 일정 중 제일 꼼꼼하게 챙기는 부분이다. 세 끼 중, 저녁과 아침식사 일부는 꼭 뜨신 밥과 시원한 국으로 그 날 그 날 속을 달래고 풀어주는 것, 그래서 지속적으로 매일매일 다른 고도에 적응하도록 돕는 것.


뭐 거기까지 가서 현지 음식 안 먹고, 한식 먹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해보면 안다.

매 순간 부딪히는 한계상황 속에서 몸이 본능적으로 원하는 음식과 그걸 채워주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니까!


농담 아니고, 이렇게 신경 써 주지 않았으면 얼마 안 가 대부분 퍼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산에서 먹는 일을 살피는 것은 걷는 것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일 그 자체다.


한식 밑반찬  3종 세트, Markha, Ladakh 2016
start of the day, Markha, Ladakh 2016




밥도 먹고 몸도 가벼워졌으니, 이제 출발해 볼까!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저번에도 물이 불어나 신발 벗고 바지를 허벅지까지 올려서 작은 강을 넘은 적이 있었는데, 이 날도 그랬다.

보기엔 졸졸 흐르는 얕은 시냇물 같아 보이지만, 물살이 엄청 세고 꽤 깊어서 키 작은 나는 무릎 아래까지 잠겼다. 삼삼오오 손을 꽉 잡고 함께 건너지 않으면 휘청이며 못 건널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발이 얼어버릴 정도로 물이 찼다.

그런데 이렇게 맨 발로 한 번 개울을 건너면 온 몸이 샤워를 한 것처럼 개운해졌다.

진짜진짜 신기한 일이었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샤워를 해 본 적이 없음에도 저 번에 한 번, 이 날 한 번 비교적 양호하게 두 번씩이나 걷던 중 샤워를 한 셈이었으니, 우리는 운이 아주 좋았다.



그나저나... 샤워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날은 싸부가 화가 아주 많이 났다.

이유 없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언성이 살짝 높아지려고 할 때는 나도 모르게 움찔.

아아 싸부가 화내는 건 언제나 무섭다.






한 마디로 우리가 너무 느슨해졌었다.


트레킹 4일째-

산에서의 생활에 조금 익숙해지는 한편, 누적된 피로가 살짝 버거워지기 시작할 무렵의 애매한 몸 상태가 그대로 마음에 드러났던 것 같다.


저마다 각자 입장에서는 '혼자만 조금 늦게 가고, 혼자만 조금 천천히 가고, 혼자만 쉬엄쉬엄 가는 것' 같지만 전체를 통솔하는 입장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열 명 모두가 거북이처럼 걷고 있는 걸 보게 되는 거다. 으아 내가 생각해도 복장 터질 일이다.


더군다나 이 날은


예를 들어 오전에 두 시간이면 대체적으로 어디까지는 도착해있어야 하는데, 그에 반도 못 갔던가...

앞에 말했듯이 이 날 걸어야 할 분량 자체가 많았는데, 대체 언제 도착하려고 그랬는지!

보다 못한 싸부가 따끔하게 쓴소리를 한 거다.


순간 정적-


그래 한 번쯤 필요한 때였다.

그냥 두면 한없이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각자 잘 추슬러서 다시 한번 힘을 내야 할 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단체로 혼이 나고 나서, 바로 여기를 올랐다.


Tacha monastery


좁디좁은 비탈길을 올라 까마득한 꼭대기에 자리한 아주 작은 암자였는데, 스님 한 분께서 매일 오르내리며 관리를 한다고 들었다. 사진은 2/3쯤 올라왔을 때 찍은 거다. 왼쪽에 작게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씩 겨우 걸어 다닐 정도의 길만 나 있다고 보면 된다. 난 너무 어지러워서 벽에 붙어서 기어가다시피 했다.

어떻게 여길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시는지, 정말 대단.


Tacha monastery,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다 올라와서 주위를 둘러보니 병풍처럼 둘러싼 맞은편 바위산이 꼭 중국 영화에 나오는 적벽 같았다.

그래 이거지, 항상 이 맛에 올라오는 거지!


솔직히 중간에 너무 어지러워서 다시 내려가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후달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겨우 올라간 거다. 무언가 잡을 난간도 없이 바로 그대로 절벽이어서 정말 아찔했다.


Tacha monastery,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Tacha monastery,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Tacha monastery,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삼배를 하려고 법당에 들어서자 순간 마음이 고요해졌다.


무척 아늑했다. 한 시간쯤 그곳에 앉아 있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아주 아주 좋았다. 안 올라왔으면 큰 일 날 뻔했다.

이 높은 곳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을 줄이야.


뭐든 그냥 하는 게 중요한 거다.

기대 없이 생각 없이, 다만 몸으로 행동으로.


Tacha monastery,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Tacha monastery,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Tacha monastery,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꽤 높은 곳에 있던지라 빨리 갔다 온다고 했는데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또 걸었다.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벌써부터 멀게 느껴지는 것인지!


한참을 걷는데, 멀리  텐트를 쳐놓은 tea shop 이 보였다.

음료수를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늘 아래 쉬고 싶어서 들어갔다.

잠깐이라도 해를 피하니 숨 좀 돌리겠더라.

갈 길이 멀어 엉덩이 무겁게 앉아 있지도 못 했다. 바로 일어났다.


아, 오늘은 대체 얼만큼을 가야 하는 걸까.


tea shop, on the way to Hankar, Ladakh 2016
점심 도시락 Lunch, on the road, Ladakh 2016


어디서 점심을 먹었는지가 잘 기억이 안 난다.

이 즈음해서 앞 뒤로 사진이 몇 장 없는 걸 보니 힘들었나 보다.

카메라는 꺼내지도 못한 거다.


저 밀가루를 튀긴 빵은 목이 막혀서 반도 못 먹었다.

달걀 하나 먹고 땡, 했던 것 같다.

몸이 힘든 날은 뭐가 들어가지도 않는다.


꾸역꾸역 밥을 먹는데, 그새 마음 약해진 싸부가 우리를 다독인다.

마음을 새로 먹고, 예상 도착시간보다 훨씬 늦긴 하겠지만 해지기 전까지 열심히 가보자 한다.

분위기가 금세 몽글몽글해지고, 다들 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 끝도 없이 걸었다.

오르막 내리막 없이 평지를 이렇게 걸으니 나중에는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이때부터 급격하게 몸상태가 안 좋아졌다.


어, 평지를 걷는데 왜 이렇게 힘들지? 싶었다.

도저히 못 걸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는 당장 내일이 걱정됐다.

오늘 벌써 이런데 다음 날 예정된 4,700m은 또 어떻게 가지?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무리라는 신호였다.


갑자기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어쩔까 한참을 고민하며 걷다가 싸부한테 물었다.


"저기, 저... 오늘 약 먹으면 안 될까요?"

"왜요? 저번에 4,800m에서 그랬잖아요."

"지금 너무 힘들어서, 내일 못 갈 것 같은데요..."

"그래요? 그럼 이따 싯따르따하고 상의해보고 결정합시다."



나는 비아그라를 먹어도 안 들었다.


아무래도 고산 약은 무척 독해서 웬만하면 안 먹게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 너무 힘들어하니까 싸부가 두 번째 패스 5,200m 콩마루라를 넘을 때는 다른 약을 먹자고 했었다. 그런데 그게 12시간 전에 먹어야 당일에 약효를 발휘한다니, 모레 콩마루라를 넘으려면 내일 저녁에 먹어야 하는 거다. 그런 걸 하루 더 당겨, 내일 못 걷겠으니 오늘도 먹고 싶다고... 맛난 음식도 아닌데 뭐 하자는 건지 나 역시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우야둥둥 이틀을 내리 약에 의지해서라도 일단은 무사히 넘고 봐야 했다. 무조건이었다.


이건 뭐 선택이랄 게 없다. 선택이라는 건 그나마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거니까.








짜잔~~ 한참을 걷는데 갑자기 펼쳐진

그림같은 동화 속 집 한 채!!


정말 깜짝 놀랐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공간이 마술을 부린 듯, 아늑한 산세 안에 폭 안겨있었다. 게다가 주인인 듯 보이는 묘하게 생긴 할머니는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마귀할멈같이 생겼... 미스테리다)


흐드러진 꽃밭에 벌이 날아다녔다.

온통 향기가 그윽했다.


와 정말, 이런 장면은 어디론가 뿅-하고 시간 이동을 했다고 밖에 설명이 안되었다.


힘들지?

자, 인심이다. 5분만 있어봐.



레드 썬!





꽃과 풍경에 취해 한참을 앉아 쉬었다.

여기서 조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이 주는 힘이란 게 대단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니-


저 너머엔 아직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설산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래, 또 가보자.


한 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그런데 남은 구간은 내게 아주 많이 어려웠다.

남아 있던 기운을 몽땅 끌어다 썼나 보다.

아무리 득득 바닥을 긁어도 도통 뭐가 나오질 않았다.


뱃심이 다 빠져 허리가 굽었다.

호흡이 다시 밭아지기 시작하면서

얼마큼 남았지, 얼마큼 남았지? 초조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얼른 주세요." 누군가 내 가방을 거뜬히 들어주고

"호흡 두 번에 나눠서 하세요" 지친 마음도 슬쩍 들어준다. 나는 또 그 힘으로 버티며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 어... 기 우리 텐트가 보였다.

아아아 너무 기뻤는데, 아무 힘도 남아있질 않았다.

개미같은 목소리 한 줄 나오지 않았다.


누가 업어준다고 했으면 체면 불구하고 폴짝 뛰어

등에 달라붙었을지도 모른다.


긴 하루였다.

정말 긴- 하루였다.



오랫만에 세찬 물길 깨끗한 냇가에서 빨래를 했다.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았다. 덕분에 정신이 났다.
다이닝텐트 /  잠을 자는 텐트는 2인용 정도로 작고, 사람들이 모여 밥을 먹는 다이닝텐트는 이렇게 크다.
바로 옆 개울 흐르는 소리가 아주 시원했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개울에서 한참 물놀이를 마치고 뽀얀 얼굴로 다이닝 텐트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슬쩍 누웠다. 아이고, 좋다.
저녁 반찬, 어느새 깍두기를 무치고 나물을 했는지!
전까지 부쳤네! 간장 찍어먹으라고- 아 정말이지 빠상은 엄마였다.
이 날 저녁 메뉴는 짜장밥. 처음엔 입맛이 없어서 조금 펐는데, 아휴 왜르케 맛난 거야! 밥을 고봉으로 먹었네.



근심, 걱정, 불안, 슬픔 등 사람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진심 어린 작은 공감만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한다.



위로라는 게 딴 게 아니다.



그저 서로의 하루를 물어주고

작은 변화에 관심을 가져주고

소소한 표현들을 주고받으며

같이 느끼면서 사는 거.



공감 불능 이기적이기만 했던 내가

이번에 제대로 배웠다.

(온통 받기만 했다는 게 문제지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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