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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안 Sep 19. 2016

19 니말링 사진일기, 마르카밸리 5th day

Ladakh - India 7월 한 달의 기록 2016



아침은 언제나 따뜻한 햇살 아래, 포근하게.

이 날은 서양식 브런치 느낌 물씬 나는 한 상이었다.




결정적 순간, 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오로지 그때 거기 있었기 때문에만 가능한 일. 예견치 못한 느낌의 찰나, 선택해버린 순간들. 평범하지 않았으나 의심 없이 걸어온 길. 그것들이 나를 지금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이제야, 지금의 내가 자연스럽다.


여태껏 왜 그렇게 산에 갔는지에 대한 늦은 답일지도 모르겠다.



4,700m에 가까워지는데도 이렇게 초록이라니!
평화로워보이는 작은 호수가 이 고도에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
야크들이 물마시며 여유롭다. 이게 가능한 거야?!



걷는다는 건 과정이 다다.
결과만 있을 수 없다.

진저리 칠만큼 지난한 과정을 오롯이 겪어내야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그저 하루살이처럼, 순간순간으로 쪼개서 걸었다.


오늘도 한걸음,

내일도 한걸음.


그랬더니 어느새 산도 넘고 강도 넘고 있더라. 매일매일을 이 단순하고 간단한 일들을 반복했을 뿐이다. 거대한 자연 속으로 녹아들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니말링 Nimalling 4,700m은 내일 콩마루라 Kongmaru La 5,200m을 넘기 전 적응을 잘 해야 하는 두 번째로 높은 고도였다. 그런데 곳곳이 초록이었다. 옆으로는 개울이 졸졸 흐르기도 하고 중간 턱에는 자그마한 호수가 두 개나 있었다.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네팔에서 트레킹을 할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와... 계속 놀라면서 걸었다. 풍경만으로는 봄길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참, 예뻤다.


이게 얼마나 드문 광경인지 비교하고 싶어서, 사진을 막 찾았다. 으아 있다! 내가 제일 처음 트레킹 했던 에베레스트, 칼라빠따르 Kalapathar 가는 길이다. 다시 가겠냐고 물으면 우물쭈물 선뜻 대답이 안 나오는 유일한 곳, 내 애증 가득한 칼라빠따르!


비슷한 고도에서의 전혀 다른 모습들.



너무 쎄다, on the way to Kalapathar, Nepal 2008
신기루같았던 딱 한 곳, on the way to Kalapathar, Nepal 2008
풀 한포기가 없다.  on the way to Kalapathar, Nepal 2008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곳,  on the way to Kalapathar, Nepal 2008






니말링 도착 후, 간식시간!

싸부가 라면을 끓여주었다. 매운 고추 듬뿍 넣어 칼칼하고 맵싹하게. 비아그라보다 더 잘 듣는 고산 예방약이다. 금세 온몸이 후끈, 땀이 송글송글해졌다.


한국에선 일 년에 한 번 겨우 먹을까 말까 한 라면을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귀하게 아껴 먹었다. 마약을 탄 것 마냥 온 세포들이 좋아한다. 긴장이 탁 풀리는 순간이다.


이런 산은 고도가 높아서 물이 잘 끓지 않는 걸 아시는지?! 그래서 면요리 하는 게 보통 상그러운 게 아니다. 전에 스파게티 할 때도 어려웠는데, 라면은 더 쉽게 불어버리니 보통 정성이 아니면 가만있어도 숨찬 고산에서 아무나 하겠다 나설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 난 못함 )


한꺼번에 끓이면 팅팅 불어서 니맛도 내 맛도 아니게 되는 걸 염려해, 조금씩 아주 여러 번에 나눠서 끓였다고 하셨다. 거의 한 시간이 걸렸나 보다. 한 그릇씩 차례로 나오는 라면을 두근두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앞에 놓인, 양푼에 담긴 라면 1.5인분ㅎㅎ 면발이 살아있다! 꼬들꼬들. 후루룩후루룩 씹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 하얀 쌀밥을 말아 3일은 굶은 사람처럼 먹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존재, 역시 나란 사람.


근데 사진을 보니 오후 참을 무슨 저녁식사처럼 먹었네! 배불러서 숨 쉬기 어려운 건지 고산이라 숨 쉬기 어려운 건지...



라다크의 수박은 주먹 두개 크기정도로 아주 작다.
텐트 주변에 가득한 햄스터, 도로 집에 데려다주었다.



라면도 먹고 시간도 넉넉하고 다른 일정은 없으니,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는 일만 남았다. 부지런히 고수차를 마시면서 고도 적응을 잘 해서 내일 저 패스를 한방에 넘어버리자!


고수차 중에서도 생차의 알싸한 청량감을 즐기며 각자 스뎅 컵을 줄줄이 세워놓고 싸부가 빼주는 차를 연신 마셨다. 어디서든 늘 맛있었지만, 특히나 산에서 마신 차는 항상 설탕을 넣은 듯 더 달았다.


확신한다. 우리가 헉헉대면서도 끝끝내 버틸 수 있었던 건 분명히, 라면과 더불어 매일 먹은 특급 고산 상비약이었던 차 덕분인 거다. 다만 그 고마움은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게 안타까울 뿐.





몇 시간을 마셨을까,

해가 지기 시작했다.



니말링 Nimalling 4,700m, Ladakh 2016



찰칵찰칵!


용수철같이 튀어나와 사진을 찍었다. 눈으로만 담아두기가 아까웠다.


여기 니말링은 4,700m쯤이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다른 곳이 생각났다. 그 높은 네팔 칼라빠따르 트레킹이 끝나고 갔던 작은 밀림 숲 치트완. 눈 덮인 설산에서 열대우림까지, 달아서 극과 극을 오갔던 경험.


지는 해의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왠지 나의 결정적 순간은 산에 처음 갔던 에베레스트와 라다크 그 어드메가 맞닿아있는 것 같다. 커다란 원을 이루듯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 자체로 이미 하나인 것.


비로소 커다란 숙제 한 편을 끝낸 것 같은 기분이다. 툭, 하고 깊은숨이 쉬어진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뭐든 이제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치트완 국립공원 Chitwan, Nepal 2008
타고르의 시가 생각나는 이른 새벽 풍경 Chitwan, Nepal 2008




당신의 그 조그만 나타남으로 인해
모든 것은 달라졌다. (...)
오래전에 내가 닿았던 우연의 세계는
이제야 하나의 방의 모습을 이루었다.
나는 집에 돌아온 것이다.



-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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