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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는 사라지고 더러는 변하고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간 많은 이야기와 비슷한 개념과 길.

by 코코넛


오늘은 과거를 둘러봤다.

아니 과거에 살았던 장소를 둘러봤다.

어린아이였을 때 내가 살았던 한옥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4층짜리 건물이 있지만

집의 주변에 있었던 골목을 비롯한 길들은 간혹 변하거나 사라진 길도 있지만

어렸을 때와 똑같은 길도 있는데, 좁고 짧아진 듯했다.

내가 걷고 뛰다 넘어졌던 그 길,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사방치기와 핀 먹기를 했었던 그 길,

저녁을 먹은 후 어른들 모르게 다시 모여 술래잡기를 했었던 그 길,

그 길을 다시 걸으면서 김기림 씨의 <길>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오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 둔 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 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김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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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의 붉은 나무



아마도 고등학교 때 시를 외우는 습관이 있었는데,

<길>은 그때 외웠던 시 중 하나다.

그리움이나 애달프다는 단어 대신에 한 폭의 그림처럼 풀어놓은 시를 감상하다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용해되거나 새롭게 태어나는 <개념>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

언젠가 읽었던 문장을 다시금 꺼내어 읽었다.


시가 인식적으로는 오류의 원천이요, 도덕적으로는 타락의 온상이라는

플라톤의 시론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에 대한 수정안을 제기해 놓고 있는 것으로, 유명해진 고전이다.

그에 의하면 시는 역사보다 훨씬 철학적인 인간의 활동이요,

바람직하지 못한 정서들을 순화시키는 정화제(catharsis)로 재해석되어,

시에 긍정적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 때문이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에서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형이상학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이 그 하나이고,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의 개념에 대해 플라톤과는 달리 인식적 지위가 부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이론적 배경에서 시는 개별적인 인간 행위의 모방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행위의 모방이다.

그러므로 개념적 인식에 가까운 것으로 해석되어 시에 즐거움과 동시에 인식적 의미가 부여된다.

결과적으로 시는 철학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한마디로, 시에 대한 그의 견해는 뮤즈에 의한 영감과는 달리

인간의 기술(techne)에 입각한 제작 활동이라는 사고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서구 미학사를 통해 진리에 대한 시의 철학적 정당성을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제시해 준 사람이다.


- 오병남의 <예술과 진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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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의 붉은 나무 1


옳다 그르다 혹은 진실과 거짓, 모방과 창조 등

인식의 범주는 시간에 의해서 거듭 태어나고 사라지는 사람의 인생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는 생각.

나는 문득문득 내가 살았던 장소를 왜 배회하는 것일까?

태어났던 동네는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서 그곳을 배회한 적이 없지만,

유년기부터 청소년기에 살았던 집의 주변부는

과거를 품은 새로움? 약간의 발전만이 있어서 불현듯 방문하게 되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 밤엔,

태어났다 소멸하거나 왜곡되기도 하는 많은 것처럼 내 마음에서도 피어났다 사라지거나

왜곡된 이미지로 남은 기억에 의존한 그 무엇은

이미 사실의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을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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