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코넛 Oct 24. 2024

백설여왕

믿음이 없는 시간은 슬픔이 넘치는 절망의 시간이다.


8.


시간을 안주삼아 와인을 홀짝이던 지선이는 갑자기 소파에 기대었던 몸을 곶추세우고 가방을 뒤졌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몰라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지 버튼이 눌려진 인형처럼 지선이는 가방 속에서 손을 빼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가방이 손을 삼켰다는 오해를 할 정도로 시간을 끌다가 가방에서 쑥 손을 뺀 지선이 손에는 빨간색 지갑이 들려있었다. 마술쇼처럼 과장된 그녀의 동작이 우스워서 나는 깔깔댔다.


"언니! 갑자기 왜 웃어? 뭐가 웃겨? 취한 티를 그렇게 팍팍 내는 건 반칙이지! 난 이제부터 진짜 달릴 거야. 나는 와인 체질이 아니고 소주 체질이라서 지금 근처의 편의점에 가서 소주와 안주를 사 올게 언니, 잠시 혼자 있어도 괜찮지?"


술을 사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지선이가 사라지자마자 자지러질 듯 터졌던 웃음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소파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창가로 갔다. 창밖은 무겁게 내려앉은 실내의 공기와 대조적으로 빛들이 현란하게 흔들렸다. 무지개보다 풍성한 빛이 마술을 부리는 시간, 신과 사람의 조우인 듯 빛과 빛이 주거니 받거니 소곤소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이에서 안온했고, 빛에 빛이 포개지면서 다른 빛이 태어난다. 인공빛과 자연빛의 부딪치는 자리마다 찍힌 점이 촘촘해서 선으로 보였다. 뛰어가서 만지고 싶다는 욕구가 출렁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빛 속에 함께하고 싶은 욕망을 낳았다. 강렬한 아름다움의 유혹은 거부하기 어렵구나. 정말 어렵구나. 남편도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을 거부하기 어려웠겠구나. 


다리에서 힘이 쑥 빠져나갔다. 주저앉은 상태에서도 아름다움에 이끌렸다.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건물 벽면이 유난히 밝아서 빛과 함께 출렁이던 눈길이 그 건물에 머물렀다. 온통 작은 전구로 촘촘한 벽에서 빛나는 전구의 빛은 흰색에 가까운 우윳빛이었다. 멀리 보이는 별처럼 작은 조명의 깜빡이는 속도는 느렸다 빨라졌다 느렸다를 이용해 리듬을 만들었다. 빨라진 조명의 깜빡임은 마치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로 보였다. 밤바다 같았다. 도심의 바다라니, 바닷물의 흐름이 수평이 아닌 수직이라니, 저절로 눈물이 났다.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은 나도 모르는 사이 의심의 보따리를 풀었다. 펼쳐진 의심의 보따리에서 풀려나온 하나하나의 촉은 남편의 행적을 향해 날았다. 촉에 맞은 남편의 행적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떨어져 마음을 파헤쳤다.  마음의 결이 엉켰다가 풀린다. 서로 엉켰다가 풀리는 사이에 마음속은 다양한 색으로 불 밝히던 빛들이 하나 둘 소등되기 시작한 마을의 입구처럼 어두워졌다. 


더듬더듬 더듬던 손에 어둠에 닿자 손이 어둠에 묻혔다. 어둠은 영지를 넓히는 군주처럼 야무지게 남김없이 주변의 사물을 흡수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나를 삼켰다. 나는 어둠에 속하는 어둠이 되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아진 이 어둠에서 나는 나를 정의할 수 없다. 어떻게 하지? 어둠에 속하자 마음에서 날뛰던 감정들, 질투, 시기, 거짓말, 슬픔, 배신, 위선이 모두 어둠에 녹아 평온했지만, 평화는 마음의 기력을 모두 거두었으므로 거부하고 싶어졌다. 아니, 어둠이 싫다. 아디로 가야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지? 오리무중이다. 


시간까지 삼켰던 어둠에 균열이 생겼다. 이상했다. 보이는 것은 온통 검은데 어둠을 비집고 드문드문 소리가 들린다.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가 나를 어둠에서 끌어내 줄 수 있는 동아줄 같다. 어둠에서 어둠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온 힘을 쏟아 소리에 집중했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들렸다. 백색노이즈처럼 소리들은 일정한 높이였다. 그러다 갑자기 바스락바스락 종이 구겨지는 소리와 숨을 깊게 내뱉는 소리가 마치 백 미터 달리기를 했을 때 들었던 신호탄 터지는 소리와 닮았다. 팔과 다리에 힘을 주는데 느낌이 기어가는 것도 아니고 헤엄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과음해서일까? 뭐지? 그때 희미하게 줄 같은 게 보여서 그 줄을 잡으려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진희야! 진희야!"


엄마 목소리다. 갑자기 왜 엄마 목소리가 들릴까? 분명히 엄마다. 다급할 때 톤과 성량 조절이 안 되는 엄마의 목소리다. 그런데 이상하다. 재현이를 낳은 이후로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이름으로 나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른다. 술에 취해서 잠시 잠이 들었고 꿈을 꾸는 중이라는 생각으로 기울려고 할 때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여보! 의사 선생님 좀 불러와요! 진희의 손가락이 지금 움직였어! 의식이 돌아왔나 봐!"


"재현어미가 깨어났다고? 알았소. 내 얼른 가서 선생님을 모셔올게요!"


엄마의 목소리에 이어서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이건 꿈이 아니다.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와 멀어져 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이라면 이번 꿈도 너무 기괴하고 생생한 꿈이다. 호텔에서 지선이와 와인을 마시다 지선이가 소주를 사러 갔고 나는 지선이를 기다리면서 창밖의 노을을 바라봤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와인 몇 잔에 필름이 끊긴 걸까? 지선이가 술을 사러 간 이후부터 다시 기억하려고 시도했다. 생각나지 않는다. 룸에서 지선이와 와인을 마시는 장면은 선명했다. 


"김진희 씨! 김진희 씨!"


남자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대고 몸을 숙인 후 내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다. 노련한 말투가 아니라 어눌했다.


"김 진희 씨! 제 말이 들리시나요? 들리면 제 말에 반응해 주세요."


들렸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다.


"따님이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커서 잘못 보신 것 같네요. 가끔 환자의 보호자들이 착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제 곧 의식이 돌아올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의사가 나가는 발자국 소리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이 바로 곁에 계셔서 벌떡 일어나 보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아직 눈을 뜨면 안 될 것 같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져서 병원에 누워있는 것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몸을 조심스럽게 한 번 더 흔든다. 그때 하나의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남편의 로펌에서 집을 향해 운전하던 중이었다. 운전하는 중에 흐느낀 이유가 뭐였지? 운전하면서 울었고, 갑자기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필름이 끊겼다. 남편의 로펌에는 왜 갔었지? 결혼한 이후로 남편 직장엘 갔었던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로 갔었지? 불편한 진실이라 기억을 지우려는 노력을 했었나? 기억을 마구 뒤졌다. 사진첩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식당에서 여자들이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은 와글와글 이해할 수 없던 소리가 이어지다 그때의 상황이 펼쳐졌다.


"어머! 이영 씨 저기, 저기 좀 봐봐! 저 여자 맞지? 저 여자 또 차변호사님 만나러 왔네!"


"어디요? 아! 맞네요 저 여자."


비빔밥을 젓가락으로 휘젓다 말고 한 여자가 말했고 옆에 앉은 여자가 된장찌개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려던 숟가락을 다시 된장찌개에 넣고 동료가 말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후 맞장구를 쳤다. 그녀들은 점심을 먹는 것보다 직장의 윗사람의 험담이 더 맛있다는 듯이 명랑하게 말하는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여자들이 하는 이야기 너머로 나도 남편과 어떤 여자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지선이가 말해주었던 이야기로 미루어 미애라고 추측했다. 그래 맞아. 지금 기억에 펼쳐진 상황은 지선이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의심이 멈추지 않아서 매일 점심시간에 맞추어 남편의 로펌 앞에서 기다리다가 여자들의 무리를 뒤따라 부근의 식당을 전전한 지 보름 정도가 지났을 때다. 


"맞네, 맞아! 저 여자는 소송이 끝난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도 자꾸 변호사님을 만나러 오는 것이 수상해! 그렇지?"


"아! 내가 어디선가 들은 얘기로는 대학 동문이라고 했어요. 동문이니까 근처에 왔다가 들렸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보기엔 뭔가가 미심쩍어. 내가 듣기로는 저 여자가 차변호사님의 첫사랑이라더라. 오변호사와 김변호사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


그녀들의 수다에서 거론한 오변호사와 김변호사는 주말에 가끔 남편과 골프를 치는 주요 멤버이면서 자주 사적으로 만나는 사이다. 


"뭐야! 그러면 둘이 자주 만나는 것은 의심할 수 있는 상황 아니야? 혹시 차변호사님 지금 바람피우는 것 아닐까?"


"제가 느낀 차변호사님은 여자를 깊이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이성적인 분 같았어요.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은 소문에 의하면 차변호사님은 여자가 많다고 해요. 저 여자도 그 여자들 중 하나 아닐까요? 가벼운 사이?"


"어머! 그런 헛소문 잘못 말하면 큰일 나! 정확한 이야기라 해도 요즘은 모두 쉬쉬하잖아. 그래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차변호사님 정말 최악이다. 사모님은 이런 사실을 모르실까?"


"여자가 달려들면, 더군다나 저렇게 예쁜 여자가 달려들면 보통은 다 흔들리지 않을까요? 저 여자 정말 예쁘지 않아요?"


"이 얘기는 정확한 뉴스인데, 왜 얼마 전에 차변호사님이 휴가 가셨었잖아. 그게 사모님과 같이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여자와 그 여자의 딸과 셋이서 같다고 하더라. 와이프에게는 출장이라고 속이고, 와이프에게는 호텔숙박권을 선물로 주면서 호캉스를 즐기라고 한 후 아주 완벽한 밀월여행을 했다니, 정말 끔찍하지 않니? 그 여자의 딸이 변호사님의 딸인데 법적으로는 아닌, 왜 있잖아 정자 기증? 여자가 법적책임 묻지 않고 혼자 낳아서 키우겠다고 약속한 후 합의하에 낳았다고 하더라고. 세상이 참 웃겨. 멀쩡한 사람들이 더 지저분하게 살기도 하고. 변호사니 법적으로 얼마나 잘 피해 가면서 할 짓 못할 짓 다 하고 사는 것이지 뭐."


"어떻게 그런 이야기까지 아세요?"


"친한 변호사들끼리 서로 자랑하느라 쏟아낸 말이 천리를 가는 격이겠지? 아마도?"


"우리 로펌에 차변과 비슷한 생활을 하는 미친놈 군단이 있지? 왜 그들은 끼리끼리 입을 맞추잖아.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변호사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 


"하하 세상 남자가 다 저런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요 혜지 씨. 서울에는 순정남도 많고, 진솔한 남자, 그리고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도 많으니."


"맞아요. 우리 직업이 문제 있는 나쁜 케이스만 의뢰인으로 만나니까 자꾸 사람을 의심하게 되는 것 같아."


회사 여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면서 수다의 대상이 대부분 남편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자직원들이 주고받는 이야길 듣고 맥이 빠져서 여직원들이 식당을 나간 후에도 한 동안 그대로 앉아있다가 백반은 손도 대지 못하고 식당을 나왔고 다른 곳을 들리지 않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지선이가 전해준 말은 모두 사실이라는 확인을 한 셈이다. 그리고, 그리고 운전했지......


남편회사 여직원들이 주고받던 이야기가 생각나자 다시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찡그렸다. 남편과 여자가 나란히 걸었으나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은 장면은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자와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은 의심할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여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가 소송이 끝난 이후로도 몇 번 방문했다. 만약 사귀는 사이라면 대놓고 회사를 찾아올 수 있을까? 확신과 사실 부정이 서로 앞다투어 앞으로 왔다 뒤로 밀려나기를 반복한다.


갑자기 눈이 부셨다. 생각에 집중하느라 의사가 오는 소리를 놓쳤다. 나이가 지긋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선 행동 후 설명주의자인지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내 눈꺼풀을 뒤집고 플래시로 비춘 다음에야  내 이름을 불렀다. 연기를 할 틈도 없는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순간 너무 당황해서 눈동자가 움직였다. 의식이 돌아온 걸 들켰다.


"동공이 반응하는 것으로 미루어 의식이 돌아왔다고 봅니다."


이전 08화 백설 여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