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을 수 없는 물벽은 흘러든 장소마다 다른 형태의 벽이다
7.
룸으로 돌아오는 동안 우린 노란불빛아래, 함께이면서 각자였다. 충격을 수습하려는 나의 침묵이 지선이의 침묵을 강요했을 수도 있다. 햇살과 조명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은은한 빛으로 이어진 터널 같은 공간을 우리는 올라갔을 때를 뒤집은 수순으로 내려왔다. 룸 안에 들어선 다음에야 걸음걸음에다 불안과 긴장을 실었음을 깨달았다. 도어키를 꽂이에 넣자 침침했던 실내는 환해졌고 긴장으로 조여있던 숨이 다투어 쏟아져 나왔다. 숨바람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나는 과호흡의 역류로 먹먹해졌다. 마치 도미노현상 같았다. 신경세포마다 먹먹함이 스며 팽팽하게 차올라 눈물로 전이될 지경에 이르렀음을 느끼자마자 쫓기듯이 나는 서둘러 말했다.
“나는 내가 마주한 모든 것에서 아름다운 부분만 바라보려고 노력했었나 봐. 대상의 추한 면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상하지? 나는 왜 부정적인 생각이 깃드는 걸 겁내는 걸까?"
느릿느릿 소파를 향해 걷는 지선이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는데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지선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소파를 향해 걸었다.
"지선아!"
나는 목소리의 볼륨을 높였다. 단지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지선이의 이름만 불렀는데도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지선이는 뒤돌아 섰다.
"너 혹시 두려움이 벽을 세우는 것 알아? 내가 화가의 길을 일찌감치 포기한 이유는 예측이 불가능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어.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겁이 많아서 모험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한 방향으로만 향했었거든, 아마도 내가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모든 일에 겁내는 게 습관으로 굳었을 거야, 내가 삶의 그늘을 외면하는 것도, 들여다보면 슬픔에 물들다가 내 존재가 슬픔으로 변할 것만 같아서였어. 너는 잘 모르지만, 내가 무런가에 빠지면 그거로부터 빠져나오기 어려운 성향이거든."
지선이는 뒷걸음으로 소파를 향해 다가가면서 나를 향해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선아!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도 아니고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내 삶이 완벽하다고 믿았어. 그런데 이 꼴이 뭐니? 곧 무너질 듯한 벽에 기댄 것 같은 이 기분은 왜일까?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것인지 모르는데, 확인되지 않은 소문 하나로 내 마음은 왜 이토록 휘둘릴까? 내 믿음이, 남편을 향한 내 믿음이 견고하지 않아서일까? 미애가 우리 가정과는 무관하다는 확신을 갖고 싶은데 왜 이리 불안하지?"
지선이는 내 말에 응대하지 않고 발뒤꿈치가 소파에 닿은 것인지 무너지듯 앉았다. 소파의 크기가 지선이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그런 지선이를 응시한 채 머뭇대다가 어색해져서 호텔 룸에 비치된 와인과 글라스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지선이에게 한 잔 하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지선이도 말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이에서 말이 사라지자 무거운 짐짝 앞에서 서로 옮기기를 주저하는 모양새와 비슷했다. 우리는 말없이 와인 병을 따고 잔에 와인을 따르고 건배도 없이 각자 와인을 마셨다. 공간의 리듬을 주도하는 의성어들들의 속도가 빨라졌다. 두 번째 잔의 한 모금을 삼키는데 지선이가 답답했는지 먼저 말을 시작했다.
“방금, 언니의 말을 듣고 그동안 언니에 대해 가졌던 고정관념이 부서졌어. 표현한 적은 없지만, 사실 표현할 기회도 없었지. 언니가 모든 부분에서 <척>하는 듯이 보였어. 그런데 <척>이 아니라 언니는 그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오늘 알았어. 동창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언니를 위선자로 표현하는 것 언니는 모르지? 지금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왜 그런 인식이 생겼는지 이해했어 언니."
지선이의 말에 나는 놀랐다. 동창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 꿈에도 몰랐다. 칭잔에만 익숙한 나는 비난이나 흉을 듣는 일이 거북했다. 그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난 그들에게 늘 있는 힘을 다해서 친절했고 배려했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돌았을까. 내 표정을 읽은 지선이는 조금 부드러운 어조로 바꾸고 나를 똑바로 쳐다본 후
"언니는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초라하게 보이는 걸 극도로 피하는 성격으로 보여. 그런 점이 언니를 감추는 데 능숙하게 하는 것 같고. 어때? 내가 언니를 제대로 파악했지? 아마도 언니는 모든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일 거야. 맞지? 언니는 언니의 치부가 될만한 일은 모두 꽁꽁 싸매놓았지? 아닌가? 내가 잘못 봤나? 언니와 이렇게 이야기를 길게 한 게 오늘이 처음이라서 내가 민감한가?"
지선이의 말을 듣다 보니 그녀가 말하는 대로 내가 박제되는 듯했다.
"아,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사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거야. 주로 들어주는 입장에만 있었거든. 때때로 조잘조잘 말을 많이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어. 굳이 감추려고 하기보다 속엣말을 꺼내는 게 힘든 거야."
어느 틈에 나는 변명하는 꼴이 되었다. 이 상황은 또 뭐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다.
"그런 느낌도 어느 정도 전해졌어 언니. 언니가 순수해서일 수도 있고, 프레임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 어느 쪽이든 둘 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거야."
하려던 말을 잠시 끊은 듯 치선이는 와인잔을 또 입에 댔다.
"언니, 난 순수를 어떻게 잃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래서 아마 내가 언니를 부러워했던 것 같아. 내 안에 순수가 존재했었는지도 궁금할 만큼 순수는 나와는 무관한 단어 같아. 언제부터인가 저절로 깨달았어. 이 세상은 고정된 것이 단 하나도 없어서 믿음은 불편한 옷이라는 걸. 특히 사람 관계는 바람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성질이라 믿으면 믿는 만큼의 상처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았기에 혼자 사는 것이거든. 나는 내 마음에 어떤 사람도 자라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어.”
내 성격을 신랄하게 분석했던 지선이는 자기 고백으로 바꾸었다. 수더분하고 명랑하다고 생각했던 지선이의 말은 다이아몬드처럼 강하고 면면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시선을 내리깔고 와인을 마시는 지선이가 이전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다르게 느껴져 당황했다. 지금 우리는 서로 당황하는 것일 수 있다. 대학 때부터 이어져 온 관계지만, 이렇게 본심을 드러내는 시간이 우리 사이에 그동안 없었다. 지선이의 개인전이나 그룹전이 있을 때마다 갔을 때 만나거나 동창회에서의 만남이 전부였다. 지선이의 작품은 한눈에 감탄사가 나오거나 이해가 힘든 편이라 매번 작업노트를 꼼꼼히 읽어야 했다.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단지 작가의 작업노르를 통해서 방대한 리서치와 분석과 제시 위에서 완성된 작품들임을 아는 지점에서 그쳤을 뿐이다. 작품을 본 후엔 언제나 지선이가 나와는 다른, 거인처럼 느껴졌었기에 지선이를 생각하면 언제나 대단하다고 느꼈었다. 자기 철학도 선명하고 미술가로서의 행보도 진취적이라서 나는 지선이를 나약하게 인식한 적도 없었고 지선이의 영혼이 자유롭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앉아서 와인을 마시는 지선이는 나약해 보였으므로 생소했다. 생소해져서 할 말을 잃었다.
“언니, 이렇게 말하게 되어서 미안한데,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위선자들이야. 꼭 집어서 언니를 지칭한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고. 사실, 국가나 도시와 같은 생명체가 군집을 이룬 공동체는 모두 전쟁터야. 서로 경쟁하고 싸워 이기는 사람이 모든 것을 차지하거든. 동물의 왕국과 다를 것이 단 하나도 없어. 만약 차이가 있다면, 사람들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서로 속고 속이고, 거짓말로 위장에 능숙하지. 그런데 언니! 속는 사람과 속이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쁠까? 물론 다수는 속이는 사람이 나쁘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돼.”
지선이의 말에 물음표가 생겼다. 무슨 의미로 저러한 말을 이 타이밍에 하는 걸까? 지선이는 두 번이나 <위선자>라는 단어를 말했다. 지금도 지선이는 내가 충격을 받아 어질어질한 마음을 감춘다고 여기는 것일까? 슬픔을 감추는 사람도 위선자일까?
"그런데 지선아 위선자는 남을 속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 맞지? 이율배반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도 위선자에 속하니?"
"사람들이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신중하게 따져가며 말하지는 않아 언니. 그냥 언니가 <척>을 잘한다는 말을 <위선자>로 표현한 것이지."
사실 나도 단어의 의미를 세세하게 따져가면서 사용한 적은 없지만 <위선자>라는 표현에 기분이 상했다.
"난 언니, 사실 미술가로 살면서도 언제나 작가로서의 나를 의심해! 미술로 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내가 작품을 통해 말하는 내용이 관객들이 공감하는 주제인지. 웃기지 언니? 평론가나 큐레이터가 내 작품에 대해 좋게 말해주면 기쁨에 들떴다가 비난하면 우울해지는, 얄팍한 내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고. 그래서일까? 난 뻔뻔한 작가들이 좋아. 사진작가인 신디 셔먼이나 데미안 허스트 같은. 내게 부족한 걸 그들은 갖고 있거든."
"아! 뻔뻔함! 작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사실 나에게도 그런 게 필요해 지선아!"
대답은 그럭저럭 했는데 내 마음은 여전히 내가 알던 지선이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지선이를 봤을 때는 그녀가 당당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의 알맹이가 외로워 보이고 쓸쓸해 보이고 슬퍼 보여서 낯설다. 그동안 지선이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으면 저런 소리가 나오지? 나는 지선이가 지금 하는 모든 말이 어쩌면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믿고 있던 남편도 지선이처럼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도 있음을 느끼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제까지의 내가 알았던 세상은 동화 속에 존재하는 가상이었을까? 어제까지 내가 살았던 삶이 가짜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자 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갔다. 나는 와인 잔에 담긴 술을 모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선이 내 잔에 다시 술을 채운다.
“언니, 그 시 알지? 삶이 우릴 속일지라고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뜬금없이 웬 시? 지선이 취했구나 생각했다.
“난 가끔, 정말 아주 슬퍼지거나 화가 나면 푸시킨의 시가 떠올라. 그는 정말 천재 같아. 언니도 그의 시를 가만히 되뇌어 봐. 조금 위안이 될 거야. 이렇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뎌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너무 뻔하지만 슬플 땐 힘이 되는 게 참 묘해.”
지선이는 쉬지 않고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와인 한 병이 모두 우리의 몸 안으로 사라진 후 나는 와인 한 병을 다시 꺼내 지선에게 넘겼다. 평상시 술을 마시지 않던 나는 벌써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지선아, 우리 미애를 이곳으로 부를까?”
“언니가 걔 전화번호 알아?”
“아니, 네가 그 말을 해 준 친구에게 물어봐서 전화하면 되지 않을까?”
지선이는 자세를 고쳐 앉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언니, 아직 형부를 사랑해?”
“당연히 사랑하지. 그러니까 함께 사는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 나한테서 들은 이야기 그냥 잊어버려. 그래야 언니가 형부와 같이 살 수 있어.”
지선이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잊어야 같이 살 수 있다는 지선이의 말은 내 남편과 미애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이로 확신하는 말과 같았다. 지선이는 내 남편을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길래 소문만 듣고 저렇게 믿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을까?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직 믿을 수 없다.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남편을 의심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몰라야 같이 살 수 있다고? 너는 그럼 내 남편이 미애를 더 좋아하면서도 미애가 폴리 아모리라 나한테 이혼을 요구하지 않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보는 거야?”
“언니, 내가 형부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니고, 무당도 아닌데 어떻게 형부의 마음을 알겠어. 그렇지만,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유감인데...... 내가 겪어보니까 남자들은 자신의 결혼생활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결혼을 유지하려고 하더라...... 그래서 아내에게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것이지. 바람을 일종의 외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 언니, 요즘은 나처럼 혼자 사는 여자가 많잖아. 결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섹스는 본능이라 해야 하니까 그냥 서로 즐기는 거야. 사랑이 아니니 서로 부담도 없고 코드가 맞으면, 분위기가 될 때, 한바탕 동물적인 것들을 쏟아내는 것뿐이야. 더러는 아이만 낳고 싶어 하는 여자도 있는데 그런 여자들 중 일부는 정자기증을 정자은행에서 받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할 수 있는 남자, 함께 즐길 수 있는 남자로부터 받는 경우도 있어. 물론 상대남에게 자신의 의도와 계획을 모두 말해주고 책임 소재를 따지지 않겠다는 각서도 작성하지."
말을 하다 지선이는 내 표정을 살피면서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한 동안 와인을 삼키지 않고 내 반응을 기다린 듯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선이가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 내게 전하는 지도 의문이고 이런 일이 정말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선이는 와인을 삼킨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가끔은 정자 기증 사실을 아내에게 들킨 사람도 있어. 아내가 아는 순간부터 문제가 복잡해지고 부부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다가 결국 부부관계, 가족관계가 깨지는 거야. 처음은 아내가 피해자이지만 어느 순간 아내는 가해자로 변해있을 때도 왕왕 발생하고.”
“너는 결혼도 안 해 보고 어떻게 그리 잘 알아? 너 작가들의 상상에서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 이야기 하는 것이지?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지.”
“언니, 나도 이제 오십이야. 내가 결혼 안 했다고 나를 숫처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내가 결혼하지 않은 것은 내 의지야. 섹스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 언니, 내가 이런 말 한다고 화내지 마! 사실 나와 섹스를 했던 사람들 중에 유부남도 여럿 있었어. 그냥 그 순간 서로 욕정이 솟구쳤던 것이지. 섹스와 사랑과 결혼은 모두 별개야 언니...... 나는 남자친구들의 연애상담도 많이 해 보았고 그들 중에는 유부남도 많아 언니. 그래서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들이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알지. 남자나 여자나 이성이 자신에게 접근하면 대부분은 그것을 즐겨, 물론 즐기는 정도의 차이는 자신을 이성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인가 아닌 가겠지. 하지만 다수가 흔들리고, 흔들리니까 사람이고, 또 그런 것이 사는 것 아닐까?. 사람도 동물이니까”
지선이는, 내가 아는 지선이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술에 취해서 저렇게 이야기하는 걸까? 그녀의 말이 모두 현재 벌어지는 일이라면 내 관념은 21세기의 삶과는 동떨어진 관념이다. 헌 옷처럼 버려져야 하는 낡고 쓸모없는 관념이다. 알 수 없는 슬픔이 마음을 채워 씁쓸한 마음을 추스르면서 나는 말했다.
“그래서 네가 결혼하지 않는 것이구나? 남자들을 믿지 못해 결혼하지 않는 것이구나?”
“아니, 남자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다 내가 나를 더 믿지 못해서야.”
“네가 너를 믿지 못한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난 상대방을 알려고 노력할 때, 그때가 제일 좋아. 조금 알고, 가까워지고 섹스까지 하면 그다음부터 남자들이 시시해져. 어쩌면 내가 좀팽이들만 만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너 술 너무 많이 마신 것 아니야?”
“언니, 우리 아직 두병도 다 비우지 않았어. 나는 혼자 세병까지 거뜬히 마셔. 하하하”
그렇게 말하고 웃는 지선이가 순간 멋있어 보였다. 내가 취하니까 별게 다 멋있어 보이는군. 그런데 정말 당돌해. 저렇게 당돌하니까 혼자 살 수 있는 것이다. 나보다 어리지만 정신적으로는 나보다 어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의 전화였다. 받을지 말지 갈등하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언니, 누구 전화? 형부?”
“응, 그 사람이 전화했는데 지금 받으면 내가 소리부터 지를 것 같아. 그래서 받기 싫었어”
“잘했어 언니, 형부가 다시 전화하면 내가 받을게, 언니가 잠들었다고 둘러댈 것이니 언니가 냉정해질 수 있을 때까지 형부와 통화하지 마!”
쓸쓸했다. 몇 시간 만에 오랜 시간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아무것도 가늠이 불가능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상상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씁쓸함을 잠재우려고 와인을 입에 잠시 물었다가 삼켰다. 와인은 미끄럼틀의 꼭대기에서 내려가듯이 거침없이 주르륵 몸의 깊숙한 곳까지 흘러내렸다. 센티멘털리즘, 잊었던 느낌, 바람 부는 바다의 파도처럼 기분이 출렁인다. <철썩> 이혼이라는 단어가 와서 부딪쳤다. 혹시 이 일이 이혼으로 이어진다면 쉰을 넘긴 나이라 마음을 추스르기가 오히려 쉬울까? 허전하지는 않을까? 생각하니 무섭다. 살림만 했던 내가 무엇에 집중하면서 남은 생을 살까? <철썩> 불안이 포말로 부서졌고, <철썩> 씁쓸함과 외로움이 윤슬로 반짝였다. 아! 내가 그리던 삶은 이게 아니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공들여 가꾸어온 가정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이라는 생각이 집요하게 마음을 움켜쥔다. 부상당한 새처럼 몸을 소파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소파가 제법 편안했다. 인생은 어차피 모래성 쌓기 아닐까?. 쌓고 부수고 또 쌓고, 다시 쌓는 놀이가 끝나는 순간이 세상에서 퇴장하는 때가 아닐까? 지금이 내가 퇴장할 시간일까?. 몸이 흔들렸다. 지진처럼 흔들려서 있는 힘을 모두 쏟아 눈을 떴다. 그 애가 너무 환하게 웃는다. 지선이었다가 미애였다가 모르는 사람으로 변하는 얼굴이 나를 보고 웃는다.
그때 ‘남편이 간직한 비밀의 방문을 절대 열지 마! 궁금해하지 마!’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발버둥 치다 소리를 질렀다. ‘이미 그 문이 열렸어. 나를 비웃듯이 스스로 그 문이 내가 열기도 전에 열렸어!‘ 찌지직 전파가 출렁이다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어머 언니! 졸고 있네? 술이 너무 약한 것 아니야? 언니 정신 차려봐! 난 이제 막 달리려고 하는데 언니가 이러면 곤란해! "
지선이가 나를 흔들면서 말을 했다. 비몽사몽, 정신 차리려고 노력해도 자꾸 이상한 소리가 귀에 들린다. 지선이 말대로 정신 차려야 해! 아직 지선이로부터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았을지도 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자연빛이 약해지면서 다양한 빛을 발산했고 인공빛이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빛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