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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넛 Oct 10. 2024

백설 여왕

우리 사이의 물이 강물일까 바다일까?

6.


듣고 보니, 입에 닮기도 싫은 폴리 아모리를 나에게 전하고 또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선이의 심정이 오롯이 이해됐다. 이해와는 다르게 내 마음은 떫었다. 마치 여러 개의 감 중에서 가장 농익은 감을 골라 먹었는데도 부드럽고 달콤한 맛의 끝자락에 따라 나온  떫은맛이 입안을 마비시킨듯한. 미애네 부부의 성적취향을 지선이에게 들은 일은 충격이었고 충격이 완화된 이후에는 떫은맛과 닮은 기분이 모든 감정과 더불어 기억까지 훼손했다. 지선이의 말마따나 미애의 사생활에 내가 끼어들어서 왈가불가할 일도 아니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단어로 판단할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미애는 한 다리 건너로 서로의 일상을 알 수 있는 관계라 딱 잘라서 듣고 알게 된 사실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남편이 다른 여자와 친밀한 관계인 걸 보고 질투가 생기지 않는 게 가능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 아니, 동물적으로도 따져도 질투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할 거야. 지선아, 내 생각이 너무 고루한 거니? 맞아. 내 사고방식이 올드할 거야. 네가 나를 올드하다고 평가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지...... 그러면 미애네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말하는...... 그게, 그 단어가 뭐였지? 아이를 낳지 않고 부부끼리 즐기면서 사는...... 아 맞다 딩크족. 미애네는 딩크족이야? 미애는 대학교 때부터 우리보다 한 발 앞서가더니 여전히 문화의 최전선에서 대중과 다르게 사는구나? 참 연구대상이다. 지선아! 네가 말한 폴리 아모리가 딩크족과 비슷한 게 맞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문화, 접해본 적 없는 영역에 첫 발을 디딘 두려움과 닮은 호기심은 턴테이블 위에 올린 바늘이 튀듯이 문장과 문장이 섞이고 빠지는 어수선한 문맥의 말로 드러났다. 지선이에게 들은 폴리 아모리라는 단어는 오랜 시간 잠들었던 호기심에 분명히 불을 붙였다. 심장의 박동수도 빨라졌다. 단순하게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다. 이 호기심은 다수가 가는 길을 외면하고 독자적으로 길을 만드는 사람이 역사에 남고 또 위대한 인물로 남는다는 걸 역이용하는 도발이라는 우려에 대한 호기심이다. 다자성애자. 한국어로 말해도 어렵고 입에 붙지도 않는 이 단어는 생각할수록 불온한데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렇게 도덕이라는 경계를 허무는 취향의 소유자가 남편의 클라이언트라는 사실이 찜찜했다. 찜찜한 감정이 불쾌한 감정으로 전이된 것은 미애가 남편의 전 여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남편의 전 여자친구가 고객으로 남편 앞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닌 계획적인 접근일 듯했다. 한 번 싹튼 의심은 쑥쑥 자랐다. 


"언니, 폴리 아모리와 딩크족은 완전히 다른 거야. 딩크족은 결혼 후 자녀를 낳지 않고 연인처럼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그러니까 자녀를 포기한 부부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들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언제든 아이를 낳을 수도 있는 딩크족이 많으니, 딩크족은 사회가 양산한 젊은 부부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 언니. 폴리 아모리와 견주면 건전한? 어 설명도 어렵다 언니. 단어 선택을 잘못하면 폴리 아모리를 비하하는 것으로 비칠 수가 있어서."


"사회생활을 하는 너도 폴리 아모리를 설명할 때 불편하고 단어 고르는 어려움도 있다고 하니, 내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창피하게 느껴지지는 않다 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은 시끄러웠다. <폴리 아모리>라는 단어는 너무 생소했다. 영어라서 생소한 것일까? 마치 그 단어를 잊어버리면 벌을 주겠다는 경고장이라도 받은 듯이 나는 몇 번이나 속으로 단어를 외었다. 외우고 되뇌어도 입에 잘 붙지 않는 단어 <폴리 아모리>, 생경한 단어만큼이나 생경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내 일상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공존했다는 사실은 두려움을 넘어 무서웠다. 이런 감정이 생기는 내가 혹시 더 비정상일까? 나 혼자만 20세기의 케케 할 수 있는 관념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것일까? TV는 백해무익하다는 부모님의 교육을 벋은 나는 TV 없이 살고 있다. 미디어와 가깝데 지내지 않아서 나는 시대에 뒤처지는 것일까? 


"언니, 나도 이제는 "라테"세대, 남자로 치면 "꼰대"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 신문화에 재빠르게 대응도 안 되고, 젊은 친구들의 연애관이나 결혼관이 바뀌었다는 점을 고무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나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 이해하는 척하면서,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는 거야. 그래야 내쳐지지 않는다는 강박일 거야. 나도 미애네 부부를 이해하지 못해 언니. 그런데 미애는 미술계에서 영향력이 큰 중개인이라서 굳이 성향을 문제 삼지 않는 것뿐이야. 현대인이라면 대부분 나처럼 처신하지 않을까?"


지선이는 자신도 나와 같다는 입장이라는 점을 아주 조심스럽게 밝혔다. 아들이 고등학생이었을 때까지는 아들 또래에서 발생한 많은 일들을 겪었으므로 나도 꽤 많은 부분에서 열린 사고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다르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다자성애를 따라잡지 못할 것 같다. 결혼한 사람이 다른 이성과 만나 사랑하면 바람피우는 것이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비난받아야 마땅하다는 내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일까? 부부가 서로 묵인하에 바람을 피울 것이라면 굳이 왜 결혼을 할까? 미애의 부부를 비롯해서 폴리 아모리라는 이름 뒤에서 순수한 감정들을 짓밟는 그들은 풍기문란죄에 해당할 것이다.  지선이와 대화하다 말고 나는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겼다. 그러자.


"언니! 괜찮아? 언니 너무 속 끓이지 마! 솔직히 몰리 아모리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비겁함을 당당함으로 둔갑시킨 삶을 즐기는 부류일 거야. 책임지지 않는 가벼운 관계를 유지면서 외롭지 않겠다는 이기적인 발상으로 볼 수도 있고. 그런데 언니 사실 이런 부류는 인류가 시작된 이 후로 지속적으로 존재했었어. 언니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시골에서는 암암리에 두 집 살림을 하는 사람도 많았고 내 부랄친구의 엄마는 결혼할 때 첩인지도 모른 채 갔다고 하더라. 본처가 친구 엄마가 결혼할 때 부엌에서 음식준비를 했다고 해 언니. 생각해 봐, 친구 엄마나 본처나 둘 다 얼마나 억울한 삶이었겠어. 요즘은 그나마 처음부터 서로의 취향을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니 여자와 남자가 동등해진 느낌은 들기는 해.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리고 요즘의 문화는 다름을 인정하고 옳다 그르다로 나누지 않으니까 내 주변에도 성적 소수자부터 폴리 아모리까지 성적 취향이 다양해 언니."


지선이는 내가 아둔해서 이해 못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인지 설명이 길다.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서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양한 경로로 접했다. 다름을 물론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성적 취향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내 주변 인물 중에서 성적 취향이 다른 일은 조금 다르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 주변인 중에 방금 전까지는 특별한 성적 취향이 없어서 지금 내가 더 혼란스럽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 충격은 조금씩 완화될 것도 알고 결국엔 이해하고 넘길 것이라는 걸 안다. 머리로는 다 알지만 마음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하나의 가치체계를 받아들이려면 기존의 가치를 모두 허물어야 하니까 어려운 게 아니라 내 주변인은 나와 비슷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거부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지선아. 미애네 부부가 결혼하기 전부터 그 폴리 아모리? 를 서로 밝히고 결혼한 것이야? 아니 성적 취향이 그러면 그냥 즐기면서 살지 결혼은 왜 했다고 해?"


궁금했다.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맞는 것 같았다. 물론 연애도 일대 일이어야 진정성이 있는 사랑이지.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 여럿이라는 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동물도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을 듯했다. 아니야, 이상하게 내 생각이 논리적이지 않은 생각 같다. 일대일로 사랑한다고 모두 진정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귀다 헤어진 후 다른 사람을 다시 사랑하는 일이 진정성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성적취향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모든 게 뒤죽박죽이고 생각할수록 나는 어떤 입장도 확신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폴리 아모리 동호회에서 처음 만났다는 것 같아. 그러니 결혼 전부터 미애네 부부는 다자성애를 존중하고 공감하는 사이였으니, 서로 그런 삶을 이어가자는 약속이 있는 결혼이겠지? 아마도? 나도 언니처럼 미애네 부부가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야. 내가 혼자 사는 이유는 사실 미애와 같은 사람이 주변에 여럿 있어서 나는 남자 만나기가 두려웠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니, 나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사람에 속하는 것이지. 사랑에 빠졌는데 그 남자가 나와 너무 다른 성향일 때 받을 상처가 두려워서 사랑에 빠지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으니까. 언니의 경우처럼 순수한 나이일 때, 아무것도 재고 따지지 않는 나이일 때야 할 수 있는 게 결혼 같아."


그런 나약한 말을 하는 지선이를 처음 봤다. 나는 지선이가 자유 연애주의자라, 결혼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기 싫어서 연애만 하는 줄 알았었다. 그래서 지선이가 멋있게 보이면서도 안쓰러웠다. 결혼을 안 하고 혼자 노년이 된 사람을 몇 분 아는데 그분들이 자기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분임에도 초라하고 너무 쓸쓸해 보여서다. 젊었을 때 혼자 사는 모습은 자유로워 보이고 멋있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왜 노년에 혼자 사는 모습은 반대로 느껴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지선이에게 대놓고 왜 결혼하지 않냐고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지선이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두려움이었다니, 남자 만나는 걸 두려워할 줄 상상도 못 했다.


"지선아, 그럼 너는 지금 사귀는 남자친구가 없어?"


조심스럽게 지선이에게 질문했다. 지선이는 생긋 웃더니, 


"남자친구가 있을 때도 있는데 지금은 없어.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는 편이지. 지금까지 남자에게 푹 빠져본 적이 없어 언니. 매력이 있어서 사귀기로 하면 금세 그 친구의 한계를 보게 되거든. 그래서 언니, 나는 예술과 사랑에 빠져서 남자를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어 언니. 주변에 남자 사람 친구는 아주 많아. 그런데 말 그대로 남자 사람 친구야. 그 남자 사람 친구 중에는 성적 소수자도 있고 또 아까 말한 폴리 아모리도 있어. 내 남자가 아닐 땐 상대가 어떤 취향인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게 명확할 때, 도울 수 있을 때 돕는 주고받는 관계로 지내는 것이지. 물론 내 주변의 남자 사람친구들이 모두 인성이 좋은 것도 아니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개차반도 있어. 언니."


지선이는 담담하게 주변인들에 대해서 말했다.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런 관계를 지속하는 지선이가 막연하게 너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아티스트라 사람관계가 자유로운 줄만 알았지 그 관계 안에서도 비즈니스처럼 주고받는 게 명확해야 관계가 이어지는 줄은 몰랐다. 나는 피상적으로 지선이의 삶을 동경했었는데 지선이처럼 살라고 하면 자신이 없다.


"예술계도 순수하지 않구나? 나는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진수를 뽑아내는 일에 몰두하는 집단이라 순수하리라 믿었어.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산 것일까?"


"아마 다른 업종보다는 그나마 순수한 측에 속할 수도 있어 언니. 현실세계는 아마 언니가 영화나 소설에서 보는 것보다 더 추한일이 많을 거야. 동물의 세계와 똑같아. 약육강식이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게 다를 뿐이야. 강자만 살아남는 구조거든. 언니는 말 그대로 온실에서 보호받고 살아서 아름다운 것만 바라본다고 항상 느꼈는데, 나는 그런 언니가 예뻐서 언니가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는 거야. 모르면 좋고, 알면 괴로운 일은 굳이 알려고 하지 마! 언니."


지선이는 말을 에둘러서 했지만, 지선이의 말을 듣는 순간 말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은 어쩌면 지선이가 미애의 일을 말하기 주저했던 이유와 같을 수 있음을 직감했다. 나와 미애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 남편과 미애가 어쩌면 연결되어 있어서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때로는 말보다 분위기가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지선이가 이렇게 넌지시 암시했으므로 나는 핵심에 다가갈 용기가 났다. 지선이의 1분은 지금 이 순간 나의 1시간과 같게 느껴지는 상태에서도 나는 인내심을 발휘해서 지선이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 기다리면서도 나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먼저 질문했다.


"지선아 조금 전에 네가 말하다가 은연중에 내가 알면 괴로운 일이라면 굳이 알 필요가 있겠냐고 한 말의 의미는 뭐야? 혹시 미애네 부부와 내 남편과 관련된 것이 있어?"


입 밖으로 궁금증의 핵심을 내뱉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지는 듯도 했다. 이제 지선이는 더 이상 미적대면서 말하는 걸 지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내용을 모두 털어놓아야만 할 것이다.


 “확실하게 검증된 말이 아니라 나중에 언니가 확인해야 할 일이지만, 이왕 이렇게 말이 나온 것이니 내가 들은 대로 말할게. 미애가 이번에 새롭게 만나는 상대가 형부라고 들었어. 언니의 남편.” 


그녀의 입에서 상상으로도 하기 싫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청천벽력이라는 단어가 이런 상황에 맞을까? 어이없고, 어처구니도 없고, 아니 믿기 어려운 말을 듣고 나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남편은 지금까지 줄곧 나만을 사랑하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라고 믿고 살았고, 그런 믿음이 전업주부로 사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있었다는 말을 어떻게 진실이라고 믿을까? 지선이가 잘못 안 것은 혹시 아닐 끼? 다른 사람과 남편을 착각한 것은 아닐까? 남편이 바람피우다니, 생각할 가치도 없는 말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아니 어떻게 둘이 만나게 된 거야? 아니, 언제부터 만났어? 난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든."


지선이에게 생각과 다른 질문을 했다. 만의 하나 그가 바람이 났다면 적어도 아내인 내가 무언가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래야 맞다. 나는 내가 둔한 성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무엇보다 나는 남편을 믿는다. 그는 도덕적이고 정직하며 또 미애 같은 애는 남편이 좋아하는 타입이...... (언니, 좋아요? 오빠와 저는 싫어지거나 싸우고 헤어진 것이 아니에요. 언니가 끼어들어서 내가 흔들리는 오빠를 인내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런 생각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말은, 대학교 때 미애가 했었던 말이다. 그녀가 나를 찾아와서 그 말을 하고 갔었다. 아주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런데도 남편과 미애가 남녀관계로 만날 것이라는 상상은 부정하고 싶었다.


"언니, 형부가 바람피우는 게 아닐 수도 있으니 내가 했던 말은 그냥 잊어버리는 게 좋아."


지선이는 폭탄을 터트린 사람답지 않게 핑크색 젤리를 들어 입 안에 넣고 웃었다. 어쩌면 그녀는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던 만큼  나에게 털어놓은 후련함으로 단맛을 즐기는 듯했다. 나는 아직 남편을 믿는 남편의 편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화가 나는 이야기지만 지금 흥분하면 남편의 바람을 믿는 게 된다. 이십 년 이상의 결혼 생활이 오해일 수 있는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건 어리석다. 그 이상의 정보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 더 그녀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그런 헛소문은 어디서 시작되는 거니? 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자세하게 네가 들은 이야기를 모두 말해줘 지선아.” 


"언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듣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지선이는 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눈빛엔 흔들림 없는 강함과 냉정함이 있었다.


"알았어. 들을 준비되었으니 말해!"


 “내가 이야기를 들었던 그날, 그 이야기를 해 준 친구가 사실 미애와 아주 친한 친구였어. 그래서 아마도 이 정보는 맞을 확률이 99퍼센트야 언니. 그 친구는 미애가 언니의 남편과 만나기 시작한 것을 안 이후 만나지 말라고 많이 말렸었다고 해. 미애가 형부를 찾아간 것은 미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산 관련 문제 때문이었는데 그때 이후 사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고 해. 그래서 그 친구가 미애에게 남편에게 들키기 전에 만남을 중지하라고 충고했더니 미애가 멈출 수 없다고 부연설명하다가 자기네 부부는 폴리 아모리라 서로 누구와 만나든지 터치하지 않고 산다고...... ”


99퍼센트 맞는 정보라고 말한 지선의 말이 신경의 끝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남편의 행동 중에서 수상한 점이 있었나를 생각했다. 수상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이 젊었을 때 섹스를 좋아하고 즐겼다는 기억이 났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성감대를 자극하는 스킨십을 자주 유도했었다. 그렇지만 그런 취향은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다. 갱년기가 지나고부터 남편은 식물성 남자로 변했다. 지금 내가 들은 정보는 오류가 있다. 


 “언니, 형부가 어떤 마음으로 미애를 만난 것인지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니 아직은 바람이라고 단정 짓지 마! 그리고 흥분하지도 마! 내가 본 일도 아니고 또 미애가 말을 흘린 것 중에 몇 퍼센트가 진실일지 장담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해. 대학교 때에도 미애는 자기가 관심이 꽂히면 먼저 소문부터 냈었던 아이니까.  지금은 언니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유리해.” 


머리가 띵해지면서 어지러웠다. 지선은 나에게 유리하게 행동하라고 했다. 이 상황에서 유리한 행동이라는 것이 있을까? 어떻게 행동해야 유리한 것이지? 남편의 바람을 인지하지 못한 이유가 단순하게 스킨십이 잦았다는 것 말고 여러 가지가 있었다. 월급통장을 내가 관리하게 했기에 남편이 딴 주머니를 찰 수 없다고 확신한 이유도 있고, 로펌에서 일정이 잡히지 않은 외박을 남편은 한 적이 없었다. 당장 남편에게 전화해서 따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그는 현재 출장 중이다. 그리고 지선이의 말대로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 많다. 남편은 변호사다. 섣부르게 내가 이 일로 남편을 공격하면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살면서 남편에게 불만을 가졌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내가 갑자기 모든 걸 부정하기도 어렵다. 나에게 휴가를 준 남편의 의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자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다. 남편가 나 사이에 폭이 좁은 실개울이 흐른다고 생각했었는데 폭이 갑자기 넓어져서 건너뛰기 어렵다고 자각했다. 우리 부부 사이에 흐르던 물이 개울에서 강을 건너뛰고 바다가 되었을까? 침대에 눕고 싶었다. 널브러지고 싶었다.


 “지선아, 미안한데, 우리 방으로 들어가자. 지금 이 기분으로 여러 사람에게 노출된 장소에 있는 게 힘들다.  방에 가서 편하게 술 마시자. 내가 남편을 철석같이 밑더라도 맨 정신으로 지금은 도저히 버틸 자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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