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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27. 2024

수상한 남자의 수상한 짓

전쟁터에서 만난 사람들 - 5

비가 오는 날이었다. 생방송을 준비하려고 나서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방송 시작까지 2시간 정도 남아 일단 현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도착한 곳은 키이우 독립 광장으로, 1990년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이후 민주주의 운동에 중심이 된 장소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광화문과 비슷한 공간이다. 거기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카메라를 받쳐놓기 무섭게 어디에선가 나타나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장난을 치던 사람들도 그날은 뜸했다. 키이우에서 가장 번화한 흐레샤틱 거리의 쇼핑몰은 다 문을 열고 있었지만 싸구려 가판대에서 자질구레한 액세사리를 파는 잡상인, 다짜고짜 장미꽃 한 송이를 들이밀며 돈을 요구하던 집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광장엔 스산한 분위기만 맴돌았다. 한층 굵어진 빗줄기가 인도의 보도블록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많은 전사자를 기리기 위한 공간에 불쑥 끼어든 불청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빗물에 섞여 떠내려간 것은 아닐지 상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비가 내리는 중에도 광장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 그가 군복을 입고 있었기에 전사한 전우를 추모하려고 온 군인인 줄 알았다. 다행히 생방송 중에는 비가 잠시 멈췄다. 방송을 끝내고 서둘러 카메라 장비를 정리하고 있는데 조금 전 그 남자가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는 우크라이나 군복이 아닌 사제 군복을 입고 있었다. 키는 180센티미터 정도에 약간 마른 체형이었다. 그가 우크라이나인이 아니라고 확신한 것은 그의 목에 두른 성조기 스카프를 본 뒤였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백발에 가까운 금색이었고, 정수리를 기준으로 딱 절반을 파란색으로 염색한 것이 꽤 특이해 보였다.

그가 말을 걸어왔다. 짧게 우리의 신상을 파악하더니 바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름은 라이언이고, 미국인이며 사는 곳은 하와이다. 현재 하는 일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돌아다니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전투에 나설 용병을 모집하고 있다. 그러더니 자기에게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은데 관심이 있으면 연락 달라, 너희를 위해 따로 인터뷰도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의 말 중에 ‘용병을 모집하는 에이전트’라는 점에 솔깃했지만,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우리는 그의 연락처만 받는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현장에 있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짠 하고 나타난 사람 덕분에 취재 결과물이 좋았을 때도 있었고,  반대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잘 구별해야 하는데, 특별한 비법은 없다. 내 생각에 제일 믿을 만한 방법은 ‘촉’이다. ‘촉’은 이 사람이 도움이 될 사람인지, 불순한 의도나 개인적인 욕심으로 접근해 오는 것인지 다 안다. 라이언처럼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어김없이 후자였다. 당연히 우리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한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그의 존재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처음부터 그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기자의 리포트가 나가는 도중, 앵커가 긴급 속보를 전했다. 화면이 바뀌자 한 백인 남성이 미국 비밀경호국 요원에 체포되어 연행되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나갔다. 기자는 컴퓨터그래픽 활용해 남자의 신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공개했다.


- 이름: 라이언 웨슬리 라우스

- 나이: 58세

- 국적: 미국

- 거주지: 하와이주

- 특이 사항: 강성 우크라이나 지지자로 알려짐,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전투에 참전할 용병을 모집. 용병 참가자 증언에 따르면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악명이 높았음.


이어 다양한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그의 사진이 연이어 공개됐다. 우리는 그제야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키이우에서 만났던 그 뭐야 머리카락 절반을 파란색으로 염색하고, 엄청나게 수상한 놈! 맞죠?”

“맞네요 맞아 이름이 ‘라이언’이라고 했었잖아요. 우와 소름 돋아.”

그의 체포 사유는 전 미국 대통령이자,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날드 트럼프를 암살 시도한 협의였다. 우리는 탄식과 감탄이 뒤섞인 의성어를 남발하다가 하루빨리 ‘촉’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루 종일 이 사건에 대한 추가 보도가 이어졌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큰 사건이다 보니,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다. 정작 지금 중요한 건, 라이언이 왜 그랬는지 그의 말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키이우에서 라이언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그가 우리에게 말해주려고 했던 ‘재밌는 에피소드’는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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