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만난 사람들 - 6
마리오 바르거스 요사 작가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라는 소설이 있다. 이야기는 페루 국경 아마존 밀림에 주둔한 부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페루 군부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여성들로 구성된 ‘특별봉사대’라는 비밀 조직을 창설하고 병사들의 성욕을 관리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이야기 내내 익살과 유머가 넘치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의 부조리와 성을 둘러싼 도덕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사실을 바탕에 둔 이 소설은 1973년 세상에 처음 등장했다. 비교적 오래된 작품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부분들이 보인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라는 공간적 배경도 우리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군대와 성’의 관계만 봤을 때, 지금이 맞고 그때가 틀렸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반반‘이다. 여전히 군인들 주변엔 수상한 여성들의 은밀한 유혹이 존재했다. 그 유혹의 현장에 내가 있었다.
우리가 묵던 호텔 로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안정상의 이유로 키이우 방문 때마다 같은 호텔에 머물렀는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그 여성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진한 색조 화장을 하고. 가슴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은 채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이 여성들이 특별 봉사나 위안을 목적으로 돈을 받고 방문하는 것인지, 누군가가 조직적으로 군인과 여성을 직접 연결까지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건넨 말들을 종합해서 유추해 봤을 때 그런 게 아닐지 의심이 든다는 거다. 실제로 독일 공영방송에서는 전쟁 중 발생하는 성범죄를 보도한 적이 있었다. 나도 이 문제에 흥미를 갖고 알아보다가,
내 생각에 음란마귀가 씌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지나치게 어두운 것만 쫓고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키이우 시민들을 상대로 전쟁 중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봤을 때, 의외로 많은 사람이 ‘정전’이라고 답했다. 미사일 공격이 에너지 기반 시설에 집중적으로 타격하면서 도시의 전력 공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기가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레스토랑에서는 식사 도중에 정전이 되어 난감한 적도 있다. 밥을 다 먹고 카드로 결제해야 하는데 단말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전기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한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결제 할 수 있었다. 외신 기자들이 이용하는 시설도 이런 상황인데, 일반 가정들의 처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 정부는 에너지 절감 대책으로 스크린 옥외광고를 전면 중단했다. 화려한 영상 광고로 빛나던 쇼핑몰과 고층 건물의 외벽은 어둠으로 덮어버렸다. 이런 상황은 내가 베를린과 키이우를 몇 번 더 오가는 동안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키이우 시내 한 현대식 건물의 옥외 스크린에서 영상 광고가 재생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광고를 올려다보는데 남녀의 진한 키스 장면이 흘러나왔다. 남녀 한 커플도 아니고, 여러 커플의 키스 장면이 빠르게 교차 편집되어 흘러갔다. 처음에는 연애 상대를 찾아주는 데이트앱인 줄 알았다. 계속 보고 있자니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도대체 무슨 광고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리섹스(ReSex)’라는 자선단체가 만든 ”재향군인의 성생활을 돕는다“는 내용의 홍보영상이었다.
Re 리, Sex 섹스, 다시 섹스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키이우 시내를 다니다 보면 전쟁 중 부상당한 군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 중엔 의족이나 의수에 의지하는 군인들도 많았다. 아직 전쟁 중이다 보니 부상당한 군인들에 대한 처우가 좋을 리 없다. 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장애를 얻었는데,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전쟁을 겪어 본 우리나라의 사례만 봐도 사정은 다 고만고만했다. 큰 부상을 당한 경우에는 육체적인 고통 못지않게 정신적인 충격도 심각하다. 리섹스는 그런 군인들의 심리 치료를 돕는 단체다. 특히 성 건강의 회복에 집중한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리섹스는 군인들의 성적 친밀감 회복을 돕는 것이 목표이지, 성 파트너를 제공하거나 알선하는 곳은 아니었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군인과 그의 가족들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심리적, 의료적 지원을 제공한다.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부상 후 성생활 복귀 가이드북’를 나눠주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전쟁 중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후 그 사건에 대한 공포감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이후에도 그 경험 때문에 고통받는 군인들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성생활에 어려움을 호소했다. 리섹스는 그들에게 심리 상담을 지원하며, 외상성 뇌 손상을 입은 군인의 경우 심리 상담 외에도 의료적 치료를 통해 성기능 회복을 도왔다. 또한, 파트너와의 건강한 성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들의 파트너에게도 교육을 제공했다. 리섹스는 부상당한 군인들에게 항상 이렇게 강조했다.
"정상적으로 섹스를 할 수 있어야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안의 음란마귀를 확인했던 슬로건!
“섹스 토이를 함께 선택하는 것은 정상적이며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와 같은 조직은 21세기 군부대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이 발표된 70년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성이 유머와 풍자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지만, 오늘날에는 성착취와 성차별 등 여성의 도구화 문제를 비판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모르는 은밀한 손짓이 어딘가에서 군인들을 유혹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복잡해진 전쟁의 양상만큼이나 군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도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쌓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