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만난 사람들 - 4
그때는 분명 힘들었다. 당장 한 시간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 속에서 정신을 놓지 않으려 스스로를 다그쳤다.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 그때를 회상하면 좋은 기억만 떠오른다. 아마도 좋은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이어서 그런 것 같다.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운짱(운전기사) 형님은 짧은 상고머리를 한 50대 후반 남성으로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약 530킬로미터 떨어진 체르니우치 출신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유직’이라고 불렀다. (그의 본명은 길고 발음하기 어려웠다.)다부진 덩치에 소싯적 힘 꾀나 썼을 것 같은데, 밝고 사교적인 성격 덕분에 푸근한 인상을 풍겼다. 늘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이따금 뚫고 나오는 눈빛이 매서웠다. 생방송 스탠바이 중에 수상한 사람이 접근해 오면 우리 곁을 딱 지키고 서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부터 사람과 장비를 보호해 주었다. 그럴 때면 이게 원래 그의 모습이 아닐지 생각했다. 방송과 방송 사이, 짬을 내어 쉴 때도 유직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내가 옆자리를 가리키며 앉아서 같이 쉬자는 신호를 보냈으나 그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우리는 양 같고, 유직은 양치기 같았다. 양들은 언제나 맹수나 자연재해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있다. 그 아슬아슬한 위험이 양치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유직은 그 역할을 즐기고 있었다. 방송을 모두 마치고 자동차로 돌아오면 어느새 푸근한 운짱 형님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크라이나어를 한마디도 못 했다. 구글번역기가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우리의 모든 대화는 구글번역기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밌었다. 다 큰 아저씨들이 6인치 폰화면 앞으로 모여 깔깔거렸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니까 번거로웠다. 귀찮은 것은 생략하고 그냥 손짓 발짓을 동원해 바디랭귀지로 소통했다. 그러니 점점 대화가 줄어들고, 원치 않는 침묵이 자주 찾아왔다. 나는 서먹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대학생 때 익힌 러시아어를 섞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유직! 스파시바(고맙습니다)”
“하라쇼! 하라쇼! (좋다! 좋아!)”
내가 알고 있는 기초 단어들을 모조리 동원됐다. 언어가 다르고 민족이 달라,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이질감을, 나름대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내가 솔직히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확신이 들자, 나는 가는 곳마다 러시아어를 애용했다. 레스토랑, 카페, 마트, 호텔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처음엔 웃어주다가 어느 순간 차갑게 식어버렸다. 기특하게 여겨줄 거로 생각했던 유직도 그저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생각해 보니 유직이 ‘스파시바’라고 말한 적이 있나, 기억을 더듬어봤다. 딱히 생각나는 장면이 없었다. 뭔가 꺼림직해서 말없이 가만있었다. 유직이 그런 낌새를 차렸는지 내 옆으로 다가와 스마트폰을 내밀어 보였다. 구글번역기 창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영환씨 스파시바는 러시아어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댜쿠유‘라고 해야 합니다.’
오 마이 갓,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가 다르다는 것을, 실제 소비에트 시절엔 한 나라였기 때문에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 중인 나라에서 적국의 언어로 떠들고 다녔으니 불식간에 누군가에게 귀싸대기를 얻어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되레 반대편 뺨을 내밀어야 할 판이었다. 나는 연거푸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진짜로 미안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촐싹대는 꼬락서니가 밉살스러웠을 텐데, 그러나 그는 의외로 신선한 제안을 했다.
“보르시(Borscht) 먹으러 갑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는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다.”고 말했다. 음식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존재를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나는 마땅히 혼나야 할 실수를 저질렀고, 응당한 대가를 치뤄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 대가가 함께 식사하는 것이라니, 그는 참 관대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음식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기로 했다.
전통 의상을 갖춰 입은 종업원이 음식을 내오는 우크라이나식 레스토랑으로 갔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전식으로 수프를 받았다.
’보르시‘라는 이름의 이 수프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이다. 붉은 비트와 고기로 육수를 내고 거기에 감자, 양배추, 당근 등의 채소를 추가할 수 있다. 보통은 스메타나(사워크림)을 얹어서 먹는데, 버터빵과 곁들여 먹으면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하다. 맛은 우리나라의 소고기뭇국과 비슷한데 상큼한 맛이 조금 강하다. 이어서 메인요리가 나왔다. ‘살로’는 소금에 절인 돼지비계 요리이다. 비계라고 하길래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는데 한 번 맛을 보고는 멈출 수가 없었다. 살로는 일반적으로 빵과 마늘 그리고 겨자, 양파와 함께 먹어야 한다. 지방 특유의 풍미를 지니고 있고 겨자소스에 콕 찍어 먹으면 고소하고 알싸한 맛의 조화가 일품이다.
유직이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내가 엄지손가락 두 개를 치켜세우자,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댜쿠유!” 라고 말했다. 그가 활짝 웃었다. 살로를 먹을 줄 알면 우크라이나 사람 다 된 거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면서 살로는 보드카와 함께 먹어야 제맛이라며 다음에는 제대로 된 보드카도 마셔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제안은 아직 현실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현재 진행 중이고, 대부분은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잿빛 하늘과 그늘진 얼굴을 가까이에 두고, 이방인이라고 마냥 웃고 떠들 수는 없었다. 유직의 마음도 알기에 지금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만일 전쟁 대신 일상(日常)이 정상 궤도를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눈을 감았더라면, 그깟 보드카 한 잔 마시는 게 특별한 일이었을까. 평범해야 할 일상이 자꾸만 특별해지는 것을 보면서 내 속은 보드카를 마신 것처럼 타들어 간다.
싸늘한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유직 형님과 맛있는 보르시 한술 뜨고, 알싸한 살로에 곁들인 보드카 한 잔 마시고 싶다.
“국경을 넘기 전, 눈물로 약속했던 그것, 꼭 지킬게요, 유직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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