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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26. 2024

언더그라운드 쉘터링

전쟁터에서 만난 사람들 - 2

지난여름, 런던에 갔을 때였다. 템즈강 주변을 산책하다가 코톨드 갤러리 앞을 지나갔다. 마침, 시간 여유가 있어서 즉흥적으로 티켓을 구입해 관람을 시작했다. 별도로 마련된 2층 전시장에서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15평 남짓한 작은 전시 공간에 들어서자, 사면을 가득 메운 쉘터(Shelter) 드로잉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조용히 그 사이로 들어가 그의 작품과 마주했다.


헨리 무어는 ‘전쟁 아티스트’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0년 9월, 독일 공군은 전폭기를 동원해 영국 전역을 폭격했다. 일명 ‘블릿츠’, 런던대공습이었다. 57일간 이어진 폭격으로 런던은 불바다가 되었다. 십만 명이 넘는 런던 시민들이 지하철역과 지하대피소로 피신했다. 헨리 무어도 그들 중에 있었다. 그는 대피소에서 여러 밤을 보내면서 눈으로 본 장면들을 메모장에 적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메모를 토대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연필로 느슨하게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왁스 크레용으로 덧칠을 한 후에 수채화 물감을 발라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런 작업 방식으로 여러 개의 스토리가 탄생했다. 나는 작품 하나하나를 천천히 감상하고 싶었다. 드로잉을 담은 사각 틀이 크지 않아서 상체를 앞으로 조금 기울여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치형의 좁고 어두운 터널은 전쟁의 공포를 피해 숨어든 사람들을 품에 안은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협소한 공간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과 동시에 서로에게 기대어 안정감을 누리려는 연대 의식이 느껴졌다. 헨리 무어는 사물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묘사하면서도 조각가답게 인체의 곡선미와 볼륨감을 강조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흑백이나 절제된 색채로, 어두운 배경 속에서 명암으로 구별되는 사람의 형태가 지하대피소의 긴장된 분위기를 표현했다.


헨리 무어는 1940년 12월, 전쟁 예술가에 자문 위원회에 쉘터 스케치북(Shelter Sketch-book)이라는 제목으로 이 드로잉을 제출했다. 이 작품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전쟁 중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인간성을 보여주었으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예술적 해석을 제공해 주었다.

감상을 마치고 다음 전시장으로 넘어가는 길에 복도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소규모 전시장이어서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몸과 마음이 혼곤했다. 거친 정서적 격랑에 휘말렸던 공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2024년 새해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맞이했다. 출장 중 잠에서 깨었을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은, 눈꺼풀이 스스로 스르르 열리고, 몸 전체를 개운하게 휘감는 파르르한 떨림이 느껴질 때까지 기지개를 켜는 것이지만, 그런 일은 어쩌다가 있는 일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텔레그램(키이우시에서 제공하는 실시간 정보채널)을 열고 간밤의 공습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새해 이튿날 새벽엔 그마저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나를 잠에서 깨운 건 둔중하게 흔들리는 창문과 내 방문을 힘껏 두들기고 있는 동료 기자의 외침이었다.

“감독님! 텔레그램 메시지 확인했어요? 우리 호텔 1.5킬로미터 근방에 미사일이 떨어졌대요. 지금 당장 쉘터로 피신해야 합니다. 얼른 나와요, 얼른!”

나는 정신까지 완전히 잠에서 깬 상태는 아니어서 문고리를 붙들고 서서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꿈을 꾸는 건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연이어 쿵! 쿵! 큰 폭발음이 들렸다. 문고리를 잡은 손을 타고 진동이 전달됐다. 그 순간, 죽음의 공포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빌어먹을 실제 상황이잖아!”, 라는 외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심장 박동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대충 손에 잡히는 옷을 주워 입고 계단을 따라 쉘터로 뛰어 내려갔다. 두꺼운 철문을 열자 그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있었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 여러 명이 더 들어왔으니 누구 한 사람쯤 싫은 기색을 내비칠 법도 한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조금씩 몸을 웅크려 죽지 않고 살겠다고 숨어든 사람에게 공간을 내주었다. 나는 막막한 심정을 느끼며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고투한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과 두려움이 번갈아 치닫는 감정과의 고투였다. 어린아이들은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눈꺼풀만 깜빡거렸다. 한 아이의 볼에 남은 선명한 베개 자국에 자꾸 눈길이 갔다. 아이와 눈을 맞추려고 시도했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밀도가 높아진 공간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고 있었다. 무향실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올 만큼.

나는 팔다리에 힘이 빠져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러다가 정신없이 피신하면서 카메라를 챙기지 못했단 걸 알았다. 스마트폰을 꺼내 쉘터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숨죽이며 바깥세상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아무래도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던져 주는 구도였다. 촬영을 조기에 종료하고 다시 웅크려 앉았다. 사람들 속에서 폭격이 지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코톨드 갤러리를 나와 코벤트가든 방향으로 걸어갔다. 스트랜드 거리를 지날 때 뉴스 앱의 속보 알람이 울렸다.

오늘도 스물네 시간 쉬지 않고 ‘뉴스 속보’라는 이름으로 전쟁 상황이 전달된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이스라엘, 가자, 레바논, 이란... 미사일과 자폭 드론 폭격으로 건물이 부서지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리는 장면이 반복된다. 지나간 기억은 오히려 생생해지는데, 뉴스가 그 현실을 담아내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새삼 헨리 무어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어딘가에서 이 전쟁들을 기록하고 있을 또 다른 헨리 무어를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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