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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는

feat. 눈먼자들의 도시

#상상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태초엔 모든 사람이 앞을 볼 수 있었다는 기가 막힌 가정이었다. 과연 그런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K는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공상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에 심력을 소모했더니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K가 태어난 곳은 이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것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연습을 한 끝에 이 공장 안에선 시력 없이도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건 비단 K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함께 교육을 받았고 정규 교과과정을 모두 마치면 다들 숙련된 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과거 ‘정신병원’으로 불렸던 건물의 한 병동이고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 그러니까 K의 조상들은 원랜 앞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갑자기 눈이 멀어 격리 당했다고 주장하는 소년이 나타난 건 보름 전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앞을 볼 수 있어요. 시각은 인간이 갖고 있는 기능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초적인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세뇌를 당해왔어요. 그 결과 지금처럼 앞을 볼 수 없는 사람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나뉜 채 지배 구조 속에서 살아왔죠. 여러분, 이제 눈을 뜨세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용기를 갖고 마주 하세요!” 


당연하게도 이 소년은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과격한 집단으로부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점차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는 날이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터 아예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소년의 이야기는 잊혀져갔다. 


K 역시 소년의 말을 믿진 않았지만 궁금했다. 기억이 시작되고 난 후부터 항상 들리는 저 소리, 이런저런 안내를 해주는 저 말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저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일까. 만약 그렇다면 저들도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소년의 이야기처럼 혹시 앞을 볼 수 있는 신인류인 걸까.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던 K는 우연히 어떤 목소리를 듣게 됐다. 그 목소리는 짐작컨대 금지구역으로 분류된 곳의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게 분명했다. 


갑자기 호기심이 솟아난 K는 그만 그 문을 열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엄청난 빛이 눈으로 쏟아지더니, K는 눈을 떴다. 앞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방 안에 아까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없었다. 눈을 뜬 채 둘러보니 방 안엔 사람의 흔적조차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뭔가를 보기 시작한 K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하나하나 깊이, 오랫동안 바라봤다. 특히, 그동안 손의 감각으로 의지해 배워왔던 철자를 눈으로 보는 느낌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손으로 더듬거리며 한 글자씩 읽어나가던 때와 비교해, 눈으로 보며 글자를 읽는 일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하고 황홀한 경험이었다.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와중에, K는 어떤 문서를 발견했다. 300년 전 날짜가 찍혀있는 인쇄용지에 ‘기밀’이라고 빨간색 글씨로 큼지막한 도장이 찍힌 문서였다.  


그 문서 안엔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1999년 어느 날, 횡단보도 앞에 멈췄던 어떤 운전자의 눈이 갑자기 멀었고 그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정부에선 비상대책을 내놓았는데, 눈이 먼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접촉한 사람들은 한 곳에 격리해 전염의 확산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지금 K가 있는, 과거 정신병원으로 쓰였던 건물이었다.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과거 한 소년이 퍼뜨리고 다녔던 이야기와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이어 계속 읽어 내려가자 더욱 놀라운 내용이 등장했다.  


그 정신병원에선 머지않아 큰 폭동이 일어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일부는 그곳을 빠져나갔고 일부는 남았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정신병원을 빠져나간 소수의 사람들은 시력을 되찾았으나 남아 있던 사람들은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됐다.


시력을 되찾은 사람 중 일부는 굉장히 합리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상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그러므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가 지배하자는 것이었다.


일부에선 반대도 있었지만 여론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그때부터 소위 ‘노예화 프로젝트’는 진행됐고,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세계 또한 질서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생산력을 담당해야 할 일꾼들이었으므로, 더 이상 인력의 손실이 생기지 않는 안전한 구조를 만들기 시작한 게 이 무렵이었다. 


초기의 사람들, 그러니까 당초 앞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 구조에 반기를 들었다.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 됐음에도 재워주고 먹여주는 건 고마웠지만, 노예 생활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꼼짝없이 공장에서 시키는 일을 해야만 했다. 마치 로봇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모든 인간성은 말살됐고, 공장 일에 적합한 사람들만 양산되기 시작했다. 


과거를 기억하며, 자유로웠던 시절을 그리며 반기를 든 사람들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싸우는 건 무의미했다. 그렇게 한 세대가 흐르고 또 다음 세대가 오면서 저항의식은 점점 약해졌고, 그와 동시에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안전망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막상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자유를 보장 받고 있고, 식량 걱정 잠자리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사회가 뭐가 그리 나쁜가. 


2100년에 접어들자 혁명을 꿈꾸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2200년이 찾아오자 자녀들에게 과거엔 우리도 앞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하는 부모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K가 태어난 2300년, 세상은 원래 이런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종은 본래 앞을 볼 수 없었고, 그 핸디캡을 과학기술로 극복해온 것으로. 따라서 그 업적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되기 위해 태어나는 순간부터 열심히 노동력을 갈고닦아 마치 하나의 부품처럼 공장 일을 하는 것. 그게 삶의 이유였다. 


그러나 한순간에 모든 게 달라졌다. 눈을 뜬 K는 지난 수백 년, 아니 수천 년간 인간이 남겼던 찬란한 문화유산들을 각종 시청각 자료를 통해 섭렵했다. 그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인간이 원래 앞을 볼 수 있는 생물이었다면 이건 너무나 엄청난 비극이 아닌가.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이렇게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방 안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인류가 남긴 텍스트들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방을 나선 K에게, 이젠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사실상 노예였다. 오직 일하기 위해 태어나 일만 하다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행복을 찾았고 저마다 즐길 거리를 마련해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다. 


K는 며칠 동안 일을 하러 가지 않았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하지 않고 며칠 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K는 고민에 빠졌다.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나, 알린다면 어떻게 알려야 할까. 숙고 끝에 K는 평소 함께 일하던 동료를 찾아갔다.



“아저씨, 혹시 앞을 볼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일 것 같으세요?”


“응? K로구나. 요 며칠 네 목소리를 통 들을 수가 없어 걱정했는데 잘 있었구나. 그런데 갑자기 그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아저씨만 알고 계셔야 해요. 저, 사실 앞이 보여요. 원하신다면 아저씨도 앞을 볼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어요.”


“너 이 자식. 일전에 나타났던 그 소년에게 물든 것이로구나. 행여 그런 소리 어디 가서 절대 하면 안 된다. 나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지, 그러다가 맞아 죽을지도 몰라. 허튼소리 그만하고 얼른 일하러 가자.”



K는 절망했다. 예상했던 전개였지만 막상 맞닥뜨리고 나니 실망은 더 컸다. 다음 날, K는 예전에 그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앞을 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저 목소리에, 저들의 거짓 술수에 속지 마세요. 이제 지긋지긋한 노예의 삶을 끝내고 자유를 되찾을 시간입니다. 저를 믿고 따라 오세요. 여러분도 앞을 볼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K의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다. 그가 몇 번 외치기도 전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금세 사로잡혀버렸기 때문이다. 


“또 정신이 이상한 녀석이 나타났군. 목소리를 들으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요즘 젊은 것들은 일은 안 하고 놀 궁리만 해서 큰일이란 말이야.” 


“얼른 이 녀석을 꽁꽁 묶어놓고 일하러 가자고. 저놈 몫까지 우리가 감당하려면 오늘은 야근을 해야 할지도 몰라.” 


“자꾸 헛소리를 해대면 곤란하니 말을 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묶도록 해.”





#그후



"그래서요, 선생님.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나요?" 


학급의 막내 제이슨이 다섯 개나 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담임교사 테드는 일곱개의 손을 모두 휘저어 허공에 영상을 만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후엔, S가 나타났단다."


사람들에게 한참을 결박당해있던 K는 몰래 찾아온 동료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언제나 활발하고 호기심 많았던 K는 그날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말이 없어졌고 더이상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S는 호기심이 솟구쳤다. 그는 몰래 K에게 다가갔다. S가 옆에서 하루종일 떠들어댔지만 K는 단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S는 굴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K 주변에 머무른 끝에 '비밀의 방'이 어딘지 알아냈다. 


마침내 눈을 뜨게 된 S는 과거의 소년이나 K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행동했다. 자신이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다. 


S는 마치 스스로가 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님들의 세계에서 유일한 눈 뜬 자라니. 그게 나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S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복수였다. 평소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의 목소리를 찾아갔다. 그다음은 식은 죽 먹기였다. 기계가 작동되는 위치를 슬쩍 바꿔 상해를 입히는 일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날 이후 정신병원, 아니 공장의 판도는 크게 바뀌었다. 지난 200여년 간 한 번도 없던 인명피해가 생기기 시작했고 식사시간엔 배급을 못 받는 사람이 속출했다. 


S는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두려움을 이용해 사람들을 하나씩 굴복시켰다. 이제 S의 말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일과시간에 노동을 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고 마셨으며, S와 대척점에 선 사람들은 기계 앞에서 죽을 때까지 일만 하는 신세가 됐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소년과 K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 앞을 볼 수 있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거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해진 시점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K는 여전히 침묵했다. K는 더이상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사람들은 K 앞으로 몰려가 석고대죄했고, K는 꿈쩍도 하지 않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날이 바짝 선 칼을 손에 들고 S가 K에게 다가왔다. 


"이제 편하게 해드릴게요." 


S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K는 저항하지 않았다. S가 손에 쥔 칼이 K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K의 생명이 꺼지던 바로 그 순간 모든 사람의 눈이 뜨였다. 


칼을 든 채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던 S는 눈 뜬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됐고 K와 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


공장은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케 하는 아수라장이 됐다. 서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였고 죽임을 당했다. 


시간이 흘러 냉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비로소 질서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모인 각각의 집단들은 국가화되기 시작했고, 각 집단의 대표들은 공장 안의 대소사에 대해 여러 가지를 협상하며 법안을 만들어나갔다. 


집단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죽거나 노예가 됐으므로 점차 각 집단들의 규모는 커졌다. 힘이 센 집단은 다른 집단을 공격하기도 했으므로 각 집단에선 군대를 최우선으로 만들었다. 


다시, 차별이 생겼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보이지 않을 때 모두가 함께 누렸던 것들은 이제 힘 있는 자들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도 이 시점을 전후로 바뀌었다. 전투요원인 남자들이 여자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온갖 불평등이 함께 생겨났다. 




-땡, 땡, 땡 


수업종이 울렸다. 


테드는 세 개의 손으로 허공에 떠 있는 영상을 회수하면서 동시에 나머지 네 개의 손으로 수업교재들을 챙겨담았다. 


"선생님, 계속 이야기 해주세요." 


학생들이 졸라댔다. 


"역시 인간이라는 종족의 이야기는 재미있죠? 하지만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12광년 후 다음 수업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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