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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

트레바리 씀-블랙 2018년 2월 모임 독후감 (feat. 소설가의 일)


요즘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소설을 읽다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 올림픽 중계를 보다 울컥하기도 한다. 그동안 나는 눈물이 없는 게 자랑인 양 살아왔다. 초등학생 시절 캠프파이어를 할 때도, 훈련소에서 처음 전화를 할 때도 울지 않았다.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고 버텼다.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만 울어야 된다는 식의 유치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어릴 때 승부를 시작해 매일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다 보니 일희일비하지 않는 법을 조금 일찍 연습하게 된 것뿐이었다.  눈물을 보이는 친구에게는 어김없이 '그깟 바둑 한 판 졌다고 질질 짜다니!' 불호령이 떨어졌다. 




바둑을 지고 울었던 기억은 딱 하나밖에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생긴 우승상금 1000만 원 규모의 전국 어린이 대회. 지금도 이 정도 규모의 대회를 찾기 힘든데 근 20년 전이니 가치가 더 컸다. 각 지역별 예선을 거쳐 최종 본선은 63빌딩에서 열렸다. 나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 63빌딩에 갔다. 휴가를 내고 오신 어머니와 함께였다. 


당시 나의 전국 랭킹은 8위였다. 매번 8강쯤에서 랭킹 1위 독주를 하던, '천재'라고 불렸던 친구에게 번번이 패했는데, 그게 그해에만 5번이나 연속됐다. 5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화룡점정 하기 위해 대회에 출전한 그 친구와 63빌딩에서도 마주 앉았다. 그 바둑은 꽤 오랫동안 기억 한 편에 자리 잡고 떠나지 않았다. 바둑계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 '지려야 질 수 없는 바둑'을 만들어놓고 '반집'을 졌다.  


6학년이라고 하면 철부지 어린애 같지만 당시 나는 나름대로 전국 바둑대회만 3년째 출전해왔던 '선수'였다. 게다가 초등학생 신분으로 출전할 수 있는 마지막 전국 대회라는 사실에 비장감도 더해졌다. 대국장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갑자기 터져 나온 눈물은 어머니 손을 잡고 1층까지 내려가는 내내 제어가 안 됐다. 63빌딩 체리홀이란 곳에서 바둑을 뒀던 것 같은데 30몇 층쯤 됐던 것 같다.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했던 건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그날의 정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손만 꼭 잡고 옆에 서계신 어머니와 훌쩍이는 나. 그 외 모든 것은 흐르는 눈물 때문인지 전부 흐릿하다.




시간이 흘러 더 큰 좌절을 겪게 됐을 때는 단 한 방울의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만 19세 나이 제한에 걸려 연구생 제도에서 퇴출당하기 한 달 전, 탈퇴서를 작성했다. 수년간 지도해주셨던 사범님께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린 후 도장 문을 나서던 날,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나의 세계는 무너졌는데 하늘은 너무 화창했다. 나는 끝 모를 어둠으로 추락하고 있는데 햇볕은 너무 따스했다. 그 이질적인 질감은 뇌리에 새겨져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삶은 다시 살 수도 고쳐 살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만 쌓여가는 인생이 과연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있는 건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긴 한 건지 확신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작가들은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는 실패의 연속을 통해 아주 조금이라도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얻을 수 있고 그 믿음은 또다시 실패할 용기를 준다. 작가들은 용기를 내서 또 한 번 실패를 향해 돌진한다. 이 순환이 반복될수록, 실패가 쌓일수록 글은 점점 완성에 가까워진다.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는 김연수 작가의 말을 조금 각색해본다.




매일 실패한다. 그럼에도 도전한다. 여기에 행복한 삶으로 향하는 비밀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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