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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깃든 문장

트레바리 씀-블랙 2018년 1월 모임 독후감

독후감을 쓰는 게 얼마만일까. 책을 읽고 글을 쓴 적은 많지만 '독후감'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 본 것은 아마 초등학생 시절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독후감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독서 후 자신이 몰랐던 사실에 대해 느끼는 생각이나 내용에 대한 감상 등을 어떠한 형식으로든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성한 문서'. 가장 비슷한 글의 형식은 일기일 텐데, 트레바리 멤버들이 모두 읽는 공간에 일기를 쓸 수는 없으니 에세이를 쓴다고 생각하고 글을 써볼 작정이다.


트레바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작년 10월이었다. 9~12월 모임 멤버 모집이 모두 마감된 이후에야 뒤늦게 '이런 곳이 있었다니!' 하며 무릎을 칠 때의 그 아쉬움이란. 할 수 없이 새 시즌 멤버 모집 기간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기다림이 간절함으로 바뀌면서 마음이 약간 조급해졌던 것 같다.


수 십 개의 북클럽을 유영하면서 후보들을 '찜' 했는데, 찜한 클럽만 해도 10개가 넘었다. 선택장애에 시달리다 일순 머릿속이 환해졌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에 빠지는 건 죄악이나 다름 없으므로 참석 가능한 날짜를 고르면 되는 문제였다. 그런 방식으로 1월부터 4월까지 근무 일정을 샅샅이 훑었다. 4월 일정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3월까지 일정을 확인한 바로는 씀-블랙이 적격이었다. 하여, 아직 어떤 책을 읽을지 조차 정해지지 않았을 때 씀-블랙 클럽의 멤버십을 신청하고 말았다.


트레바리의 유능한 크루님들께서 어련히 알아서 읽을 책을 공지해줄 텐데, 그 새를 못 참고 “12월 중순에 1월 모임에 읽을 책이 안내된다고 나와 있던데 아직 공지가 없네요. 저희 모임은 어떤 책을 읽나요?” 하고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격무에 시달리고 계신 분들을 귀찮게 해서 죄송스러운 마음이지만 호기심이 너무 컸다.


그러던 중, 드디어 메시지가 왔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안내된 링크에 접속하자 트레바리의 수많은 북클럽에서 읽는 책들이 빼곡하게 적힌 문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에서부터 천천히, 일부러 천천히 책 제목을 확인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읽고 싶은 책들이 정말 많았다. 기대에 부푼 상태로 드디어 ‘씀’ 단락에 이르렀는데, 믿을 수 없게도(?) 우리 클럽에서 읽을 책의 제목은 이름도 생소한 『랩걸』이었다.


이럴 수가. 하고많은 책들 중에 랩걸이라니.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과학도서를 마주하고 고민에 빠졌다. 다른 클럽을 알아봐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때 트레바리 윤수영 대표님의 글이 떠올랐다. '독서모임 덕분에 혼자서는 읽지 않았을 책을 읽게 됐다'고 하셨는데, 랩걸이야 말로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평생 내가 읽지 않았을 책이었다.


큰 맘 먹고 책 목록이 나온 날 호기롭게 『랩걸』을 인터넷 주문했다(덕분에 유시민 작가의 언급으로 비롯된 품절대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도착한 책의 포장을 뜯자 홈페이지 이미지로 봤던 것과 너무나도 다른 굉장히 두꺼운(409쪽이라니! 자런 박사님,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책이 나타났다. 표지 디자인이 예쁘길래, 그리고 '과학 에세이'라길래 막연히 그림(?)도 좀 있는 얇은 책일 것이라고 내멋대로 추측했던 것이다.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의구심을 거두지 못한 채 반신반의하며 책을 펼쳤을 때, 내 걱정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호프 자런의 문장에는 삶에 대한 사랑이 깃들어있었고, 사랑이 깃든 문장은 아름다웠다. 생각보다 잘 읽혔다.


'어두운 겨울밤 아버지와 내가 공작과 왕처럼 과학관 전체가 우리 것인 양 누비고 다니던 기억(19쪽)'을 얘기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무엇을 고장 나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고치지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고 썼다. 향후 실험실에서의 삶을 예시하는 문장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자에게 구속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했다(79쪽)'는 문장은 마음이 아팠다. 공감하는 내용이라 글로도 쓰고 싶지만(이미 1000자가 넘었으므로), '씀 토크'를 위해 아껴둔다.


'첫 뿌리의 첫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81쪽)이라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세 페이지 분량의 글에서는 뿌리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랑이 담긴 문장은 흡인력이 있다. 84쪽에 '보통 사람은 자신이 떨어뜨린 물건을 다시 줍느라 한 20초 정도 발 주변을 살피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이상 흙을 들여다보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라는 문장이 있다. 이 글을 읽다가 멘토였던 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가끔씩 걷다가 하늘을 봐. 항상 앞만 보고 걷는 사람과 가끔씩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는 사람의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질 수밖에 없어."


그때 이후로 '하늘 보기'를 시전하려 했으나 돌이켜보니 쉽지 않았다. 20초 이상 흙을 들여다보는 일도 쉽지 않겠지만 의식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내 주변 생명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관심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96쪽부터 시작되는 이파리 이야기도 압권이었다. 선인장의 가시가 이파리였다니! 400쪽에서 자런 박사가 제안하는 것처럼 나무를 심을 능력이 아직 나에게는 없다. 그렇다면 선인장이라도 먼저 키워볼까 하고 관련 지식을 찾고 있는 나를 보며, 스스로 조금이라도 변했음을 느낀다.


호프 자런의 살아 숨쉬는 듯한 문장 덕택에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끔찍한 자동차 사고(223~225쪽) 이후, 자런은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이제부터 내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내가 바랄 자격도 없는 과분한 선물이 될 것(226쪽)'이라고 적었다.


독자들에게 임신 사실을 전할 때, '임신은 내가 그때까지 평생 해본 일 중 가장 힘든 일이었다(302쪽)'고 운을 떼는 작가는 아마 호프 자런밖에 없을 것이다. 79쪽의 문장과 맞물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기도 할 '여성 평등(혹은 페미니즘)' 문제는 북 토크 혹은 씀 토크에서 꼭 다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157쪽에서 호프 자런은 빌과 함께 일할 때 '왈츠 같은 리듬이 생긴다'고 썼다. 빌의 이야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지만 어느덧 2000자를 넘기고 있다. 이래서는 아무도 이 글을 읽어보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다른 분들의 독후감에서 충분히 언급되리라 기대하고 이쯤에서 슬슬 마무리를 해야할 것 같다. 


내 삶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을 더 사랑하고 싶다. 호프 자런처럼 열정적으로, 치열하게 그리고 좌절을 겪더라도 다시 일어서는(고장난 것을 고치지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므로) 삶을 살고 싶다. 초심이 점점 옅어지고 열정은 사그라들고 있던 나에게 『랩걸』은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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