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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에게 이끌려 달리기의 세계로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는 않'고 싶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불가사의한 체험이다. 이를 경험하는 것과 경험하지 않는 것과는 인생 그 자체의 색깔도 조금은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무라카미 하루키)




평소 몸 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그래, 나도 한 번 달리기를 해볼까' 하고 마음먹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어딘가에서 본 위 인용구를 읽고 갑자기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정말 마라톤을 완주했음에도 '인생 그 자체의 색깔'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추후 하루키 선생을 만났을 때(그런 날이 과연 올지는 모르겠으나) "선생님, 제가 직접 42.195km를 경험해봤습니다만, 제 인생의 색깔은 전연 달라지지 않았습니다"하고 말해볼 요량이었다.




작년 3월,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동아마라톤 10km 부문이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 완주 기록은 51분이었다. 첫 출전치곤 준수하게 달리지 않았나, 스스로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 자신감을 얻어 주3일 정도는 퇴근 후에 10km씩 달리는 생활을 했다. 그 무렵이 아마 내 인생에 있어 신체와 정신의 밸런스가 가장 조화로웠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목표로 한 걸음씩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던 그때, 뜻하지 않게 사고가 일어났다. 그날따라 페이스가 너무 좋았던 게 오히려 화근이었다. 10km 지점을 약 500m 가량 남기고 갑자기 돌부리를 잘못 밟아 크게 넘어지고 만 것이다. 평소답지 않게 '막판 스퍼트'를 한답시고 전력질주를 하다가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참사였는데, 그대로 골인했더라면 10km 달리기에 있어선 '인생기록'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병원에선 인대 손상과 함께 '외측 반월상 연골 파열'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명을 제시했는데, 어쨌거나 당분간 달릴 수 없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제대로 달린 적이 없을 정도니(심지어 바디프로필을 찍는다며 다이어트를 할 때조차 러닝머신에서 경사를 최대한 높여 걷는 방법을 택했다) 그날 만난 그 돌부리는 러너로서 나의 삶을 1년 6개월 이상 퇴보시킨 셈이다.




다른 러너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 경우엔 대체로 달리기를 시작하자마자 1~2km 지점에서 이미 첫 번째 고비가 찾아온다.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온몸이 거부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비를 잘 견뎌내고 나면 대체로 반환점(이라고 하면 굉장히 거창해보이지만, 5km에 불과하다)을 돌 때까진 페이스가 점점 올라간다. 몸이 슬슬 풀리기 시작하면서 달리기 좋은 상태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7~8km 지점에선 앞서 가고 있던 러너들을 추월하는 짜릿한 경험도 종종 하게 된다.   




아무튼 이런 건 이제 모두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 올 들어 처음 참가하는 마라톤 대회가 벌써 나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 연습 러닝에서조차 10km를 완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를 하는 것처럼 신발장 속에 잠들어 있던 러닝화를 꺼내 급하게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몸이 마음 같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이래서는 완주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슬슬 초조해질 수밖에 없다.




하루키는 형편없던 마라톤 실패의 기억을 회상하며 원인으로 '달리기 양의 부족, 달리기 양의 부족, 달리기 양의 부족, 그것이 전부였다'고 반성한다. 덧붙여, 체중도 줄이지 못했다고. 나 역시 달리기 양이 부족할뿐만 아니라, 자랑은 아니지만(누가 이런 걸 자랑할 수 있을까) 하루키 선생보다 적어도 세 배쯤 체중이 더 쉽게 늘어나는 체질이다. 물론, 이걸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다(하루키 선생 또한 지금보다 세 배쯤 더 쉽게 체중이 늘어나는 체질이었다면 아마 달리 말하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참가하는 이번 마라톤은 여러모로 굉장히 힘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하지만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는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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