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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건

트레바리 문-첫금 / 자기 앞의 생, 로맹가리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현실은 도대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가. 금세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 책의 페이지는 천근, 만근의 추가 달린 것처럼 지독히도 넘어가지 않았다.


무력감에 몸서리 친 시간들이었다. 내 옆에 제2, 제3의 모모가 있었다 한들 난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


사르트르 말마따나, 우린 모두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다. 어떤 맥락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인과관계도 성립하지 않는 그 우연이 생의 대부분을 잠식한다. 그럼에도 운명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일들 앞에선, 누구라도 사회의 정치의 혹은 국가의 도움을 갈구하게 될 텐데 이 세상은 왜 아직도 약자들에게만 이토록 가혹할까.


모하메드(모모라는 애칭으로 불러주고 싶지 않다)가 한 일이 사랑이라고? 아니 그건 절대 사랑이 아니다. 아마도 그건, 정서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했던 한 작은 인간의 두려움과 의존하고 싶은 심리와 체념의 감정이 뒤섞인 총체적 슬픔의 표출이다.


사랑의 선결 조건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 생략된 제1 주어는 바로 나 자신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단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으므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모모는 스스로를 사랑했을까. 아니, 과연 그 누구라도 모모의 입장이 됐을 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이코패스에게 흔히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반인간적이다'와 같은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적인 것일까. 그건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고도 실명된 눈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 때문에 더 괴로워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모모가 죽을만큼 아프길 오히려 희망하며 죽은 로자 옆을 지키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모모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의 전형이란 걸 입증한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인간은 물리적 아픔과 괴로움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인 패닉상태에 빠진다. 썪어가며 악취를 풍기는 시체 옆에서 향수를 뿌리며 고통이 스스로를 죽여주길 기다리던 열네살 모모는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는 동물' 인간은 언제쯤 동물 레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일까. 대학 시절 내가 상상했던 유토피아는 심플했다. 전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는 세상. 모든 인간이 여느 동물들처럼 늘 생존에 대한 고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하지만 아마도 그런 세상은 내 수명 안에 도래하진 않을 것 같다.


이 책이 상을 받은 게 슬프다. 이 책이 여전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 열심히 읽히는 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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