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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울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거야

feat.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인문학, 소위 '문사철'이라고 분류되는 학문에 관심을 가진 지 꽤 오래됐다. 어린 시절엔 역사 관련 서적 읽는 걸 좋아했다. '조선왕조실록'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를 다룬 한국판 삼국지, 게다가 나관중이 쓴 '삼국지 연의'는 몇 번씩이나 봐서 어떤 대목들은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엔 소설에 푹 빠져 시간을 보냈다. 중국에선 교과서에까지 실린다는 나름 정통 무협인 김용 소설을 필두로 무협지, 판타지 소설, 추리소설 할 것 없이 거의 닥치는 대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에서 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면서 드디어 철학과 만났다. 거의 당시엔 인문학=철학 같은 느낌이었는데, 역사엔 관심이 좀 시들해졌고 소설은 뭐랄까, 공부하는 느낌 보다는 그냥 취미로 독서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머리를 싸매고 전투적으로 읽어야 했던 책들을 보는데 슬슬 지쳐가던 무렵, 공부 모임을 이끌던 멘토님이 다음 시즌엔 '소설'을 읽어보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공부 모임에서 갑자기 무슨 소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설 속엔 '문사철'이 모두 다 들어있다'는 얘기에 반신반의 하며 오랜만에 소설을 다시 읽었다.


돌이켜보면, 그럼에도 그때는 사실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모임에서 소설만 읽을 순 없으니, 다시 영역을 약간 확장해서 '인문사회과확' 서적들이 커리큘럼에 포함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소설과는 멀어지는 듯 했다.


대략 작년쯤부터였던 것 같다. 갑자기 소설과, 아니 문학 작품들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왜 그랬는지 이유조차 모르게 '프로 불편러'가 된 후, 기존 남성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 게 굉장한 고역이던 때였다. 조남주 작가를 비롯해 '쇼코의 미소'로 내 마음을 적신 최은영 작가를 만났고 한국 여성 작가 홀릭에 빠졌다.


원래 눈물이 없는 편이었고, 감정 특히 아픈 감정은 절대 드러내지 않도록 어렸을 때부터 훈련 받은 탓에 울어본 기억은 손에 꼽는 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눈물을 딱 한 번 흘린 후 성인이 된 이후까지 울어본 적이 아예 없었는데 최은영 작가의 작품을 읽다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그순간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이후엔 뒤늦게 울보가 됐는지 영화를 보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종종 눈물을 흘리곤 한다.


문학을 읽는 이유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다.


김초엽 작가의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을 하나만 꼽는다면 첫 번째 수록작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였다. 'SF소설'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읽히는 이유는 이 소설이 상상속 세계가 아닌 지금의 현실을 담고 있기 때문 아닐까. 차별의 문제, 다름을 바라보는 시각을 소위 '장르 문학'의 영역으로 풀어냈다는 점만 다르지 실질적으론 정통 문학과 차이를 두는 게 무의미해 보였다.


릴리의 실험이 성공한 지구를 상상해봤다. 모든 사람이 완벽해진 세상, 그곳은 행복할까? 서로 다른 점들, 그중에서 우월한 형태의 다름이 아니라 열등한 형태의 다름을 결함으로 인식하고 그걸 개량하려는 시도들. 이건 사실 하나의 편견, 한 가지 잣대에 의한 획일화가 아닐까. 다름이 말살된 사회, 모든 사람이 비슷한 외모를 갖고 비슷한 능력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회는... 글쎄, 행복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을 것 같다.


서로의 차이가 서로의 다름이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는 쪽이 훨씬 재밌다. 다름을 통일해 같음으로 만들바엔, 차라리 편견이란 개념 자체를 아예 들어내 버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울려 사는데 지장이 없는 사회(차별 없는 사회), 때론 기쁘기도 때론 슬프기도 하겠지만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세상. 김초엽 작가가 순례자들을 지구에 남긴 이유는 그런 세상을 꿈꿨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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