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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Jun 01. 2020

길을 잃은 나침반의 기분

우리는, 앞으로 종종 길을 잃을 것이다.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무엇이 나에게 더 좋은 길일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분명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그려지던 것들이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져 버렸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커다란 사막을 빨리 벗어나고자 열심히 뜀박질할 뿐이었다.  숨이 헐떡일 정도로 한 참을 달린 후에야 잠시 멈출 수 있었는데,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둘러보는 내 모습이 딱 그거였다.


길을 잃어 뱅글뱅글 도는 나침반 말이다.






나의 지난 세 달 이야기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야.


지난 세달동안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   '뭐하고 지내니' 라는 안부인사에 '바쁘게 지내는 것 같은데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도 꽤나 많이 한 이야기었다.  덮어 놓고 쳐다도 보지 않았던 미완의 글들 처럼, 지난 세달은 나에게 정의할 수 없는 혼돈과 막막함의 시기었다.



2020년은 불안과 설렘으로 보냈던 2019년을 보상하는 해 일 줄 알았다. 그간 열심히 일하며 모은, 어느 정도의 종잣돈으로 나의 작은 가게를 준비했고, 초반에 운영이 잘 되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여러 수입 체계도 준비해두었었다.  내가 세계정세를 읽지 못한 탓이었을까, 인류가 언제라도 바이러스 창궐의 위협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탓이었을까. 갑자기 불어닥친 코로나 여파는 나의 모든 것을 정지시켰다.

나는 이제 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을 멈추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호기로운 프리랜서와 사장님의 꿈이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에 잠시 주춤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직원이 되어, 동대문의 쇼핑센터 내 입점 해 있는 세 평 남짓의 상가들의 인테리어를 디자인하고 시공하는 일을 했다. 정말 세 달 동안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아침 7시 반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주중에는 영업을 하기 때문에 주말에 주로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주말이면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의 강도 때문에, 가족들도 친구들도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수차례 질문했다.  하지만 이유는 그들의 생각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간단했다.


겁이 났었다.

난생처음 겪는 '적자'라는 것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겁이 났었다.

내가 아무리 무언가를 해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이 연속되자 두려움은 불안함과 뒤섞여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이 불안감은, 되려 무언가에 열중할 때 쉽게 외면할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불안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기다릴 바에야, 뛰쳐나가 허우적거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쫓기듯 지난 세 달을 바쁜 일상으로 가득 채워 보냈다.



가만히 있으면 차오르는 불안감에 몸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일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 내가 그려왔고 생각했던 삶에서는 멀어지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면서 쓰던 글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쓴 지가 어언 세 달이 넘어가고 있었고, 작게나마 시작했던 가게는 무수한 사람들의 요청에도 한마디 응답조차 할 수 없었다.

계획했던 바를 다시 하기 위해, 몸도 마음도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돌아갈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목표했던 작은 꿈들은 점차 희미해지고, 해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만 맴돌게 되었다.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방향을 잡지 못하는. 고장 난 나침반의 모습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방향을 잡지 못하는 - 고장난 나침반의 모습이었다.




나의 이 복잡한 마음은 '길을 잃었다'라는 표현 외에는 수식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는 '방황중이야'라고 답했고, 내 마음이 질문하는 것들은 외면을 할 뿐이었다.   바쁘게 지내면, 차라리 그 모든 난제들로 부터 잠시나마 도망갈 수 있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답이 나오기도 한다.

바삐 움직이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 일을 시작하며 입었던 패딩을 벗을지는 오래고 어느새 반바지, 반팔을 찾는 계절이 왔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만큼, 통장 잔고는 적자가 두렵지 않을 만큼 두둑이 쌓여갔고 새로운 사람들로 연락처가 빼곡히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머리는 모든 것을 멈추고 미뤄두었던 나의 꿈들을 다시 도전해보자라고 이야기하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새로운 일에 적응한 만큼, 불안함과 두려움에 이전의 모든 것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전에 나를 설레게 했던 모든 것들은 '숙제'처럼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 하고 말이다.




아마 그때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마음의 숙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들과 , 꿈꿔 왔던 일들과, 또 새롭게 그려지는 일들 사이에서 내 마음이 납득 가능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너무나 바쁘지만, 나름 재미를 찾고 있는 인테리어 일. 하지만 너무나 바빠 내가 유지해왔던 일상들을 모두 미뤄야만 하는 일.

몇 년 동안 간절히 바라왔고, 거의 직전까지 왔었던 나의 작은 가게.

새로운 일을 하면서 새롭게 만나게 된 기회들과 사람들

숙제로만 느껴져 미뤄두었던 내 방향에 대한 질문들은, 되려 모든 것을 멈추니 두세 가지의 키워드로 좁혀졌다.

정신없이 요동치던 나침반은, 여전히 빙글빙글 돌기는 했지만 아무런 근거 없이 맴도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의 감정을 얘기해주자, 친구는 너무나 쉽게 나의 상태를 정의해주었다.


너는 방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업데이트 중이네.
더 넓고 새로운 것들을 패치 중인 거야.  


라고 말이다.


오랫동안 바라고 준비해왔던 가게는 비록 오픈하지 못했지만, 그 공간을 더욱 빛내줄 많은 것들을 지금 배우고 있노라 라고.

프리랜서로서 꽤나 목말랐던 배움에 대한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노라고.

꿈꿔왔던 것들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더 단단하게 펼칠 수 있도록 살을 붙이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그래, 내 나침반은 분명 고장나 뱅글 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더 큰 세상과 경험들로 나의 방향을  업데이트 하고 있었다.



뱅글 뱅글 업데이트 중.


어차피 원큐에 되는 것은 없다.

갑자기 달라진 외부환경에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몰라 방황한 세 달은 생각보다 어지럽고 답답했다.  그렇다고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속 시원하게 풀린 것 같진 않다.  내 나침반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예 멈춰있는 것은 아니다.  내 나침반이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넓어진 세계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뿐이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종종, 내 나침반이 고장 나는 경험을 할 것 같다.  이번처럼 상상도 못 한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을 수도 있고, 하루 사이 변덕으로 다른 일을 하고 싶을 수도 있다.   원큐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내가 살아가는 방향도 시시 때때로 고장 날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종종, 내 나침반이 고장 나는 경험을 할 것 같다.
그런데 다음에는 조금 더 근사하게, 방향이 고장 나는 순간을 마주해야겠다.


그런데 다음에는 조금 더 근사하게, 방향이 고장 나는 순간을 마주해야겠다.  길을 잃어 마주한 골목이 생각보다 근사할 수 있는 것처럼, 나의 방향이 흔들리는 순간은 내가 더 커다란 세계와 조우한 설레는 순간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길을 잃은 나침반의 기분은 어지럽고 오묘하다.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헛구역질까지 나는 기분같기도 하고, 한없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끝도 없이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오묘한 기분이다.


오늘도 나는 바삐 움직였다.  낮에는 인테리어 공사를 하러 갔다가, 오후에는 책방 모임을 갔다가 저녁에는 브런치 글을 썼다.  여전히 뱅글뱅글 정신없이 돌지만, 당장은 그 분주함을 차라리 즐기기로 했다.   


길을 잃은 나침반의 기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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