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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Jul 30. 2020

할아버지 선물 리스트

할아버지를 할아버지 답게 하는 것 

할아버지 팔순 잔칫날의 이야기다. 사실 잔치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없고, 할아버지의 생신을 기념한 온 가족 외식이었다. 생각해보면 할아버지 환갑잔치는 ‘잔치’의 모양새를 꽤나 갖추었던 것 같은 데. 처음 보는 친척들도 있었던 것 같고, 다 같이 사진 찍은 기억도 어렴풋이 있다. 그런데 그것도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십 년 전에는 손으로 무언가 꼼지락 만들어 선물이랍시고 드린 것 같다.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머리가 어느 정도 큰 후에는 내 기억에 남는 선물들을 매년 드렸던 것 같다. ‘벌이’라는 것을 하게 된 후로는, 제법 그럴싸한 선물들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선물은 매년 성공적이었다.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흡족해하셨고, 내 선물을 언제나 지니고 다니셨다. 아, 물론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손녀가 준 것이라 그럴 수 있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너무나도 분명한 ‘할아버지의 선물 리스트’가 있다.






할아버지 선물 후보군은 이렇다. 파이프 담배, 베레모 모자, 커피 혹은 독후감. 저 넷 중에 하나만 될 수 있다면 꽤나 그럴싸한 선물이 된다. 흔치 않은 리스트에, 나를 오래 보지 않은 친구들은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꼭 덧붙인다.


“우리 할아버지 전주 류씨 56대손이신데, 예술가 셔.”


할아버지는 고등학교의 국어 선생님으로 한평생 사셨다. 그리고 그가 은퇴하실 즈음에는 돌연 신춘문예 공모전에 나가 작가로 데뷔하셨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12권이나 되는 장편의 소설을 쓰셨고, 그 이후에도 단편 집을 꾸준히 내셨다. 할아버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본 적이 없어 작가로서의 그를 논할 수 없겠다. 하지만 그가 집필 활동을 위해 갑자기 홀로 시골 생활을 하셨던 적이나, 그를 기억하는 엄마의 퉁명스러움이 섞인 태도를 보면 ‘훌륭한 아버지’는 아니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가족 중에 유독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 알 수 없는 분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책에서 시작해 책으로 끝났으니까. 할아버지는 예술을 동경하는 사람이었고, 할아버지 바람대로 예술을 전공한 나는 그에게 ‘바람직한’ 손녀였다.  그래서 인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엄마와 할머니께 그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이 선물리스트는 내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와 참 잘 어울린다. 




선물 리스트에서 모두들 가장 궁금해하는 항목은 단연 파이프 담배다. 호랑이 담배 피울 시적에 피는 그런 기다란 대롱 담배 말고, 셜록 홈스가 필 법한 그런 두껍고 짧고 구부러져 있는 그런 것 말이다. 한국에서 파이프 담배를 실제로 피는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 밖에 못 봤다.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반경 10m는 갑자기 유럽으로 변한다. 난초와 산세비에리아로 가득한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그렇고, 한글로 커다랗게 ‘노인정’이라고 쓰여있는 간판 앞에서도 그렇다. 파이프 담배를 피울 적엔, 우리 할아버진 유럽의 어딘가를 거니는 고독한 문학인이 되신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이 파이프 담배를 피신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다. 내가 파리에 있을 적에 처음 피기 시작하셨으니, 한 8년쯤 된 것 같다. 파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엄마가 한밤중에 갑자기 전화했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내일, 시내 나가서 파이프 담배 좀 사봐.”

“파이프 담배?”

“아니 왜, 그 유럽 화가들이 필 법한, 그런 꼬부라진 그런 파이프 있잖아.”

“아니, 그걸 어디서 구해. 그리고 건강도 안 좋으시다며 무슨 파이프 담배야.”

“일단 구해봐. 헤밍웨이도 마크 트웨인도 파이프를 피셨단다.”


그런 갑작스러운 주문 요청에 바로 다음날 파리 시내에 나가 샀던 것이 할아버지의 첫 파이프 담 배었다.  생 봉쉘 거리의 오래된 파이프 담배 가게에서, 자그마치 80 유로나 주고 산. 호두나무로 만든 그 파이프.

할아버지는 당연히 너무나 만족해하셨다. 60년 넘은 애연 일대기에 새로운 도구가 낯설 법도 할 텐데. 내 취향대로 고른 담뱃잎이 입맛에 맞지 않으실 수도 있을 텐데 – 그렇게 연거 푸어 파이프 담배를 피우셨다. 할아버지 말마따나, 그 순간 그는 일흔의 헤밍웨이요, 마크 트웨인이었다.




할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가성비 있는 선물의 최고봉은 커피와 독후감일 것이다. 아 여기서 커피란, 진짜 커피를 드린다는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와 커피 한 잔을 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믹스커피에 프림까지 넣은 정말 다디단 커피를 드셨다. 할아버지는 커피를 드실 때 특이한 습관이 있으셨는데, 프림을 넣은 후에 잔을 젓지 않으셨다. 그러면 커피를 다 마시고 마지막에 프림의 미치도록 단 맛이 천천히 올라온다. 컵 아래 쌓여 있는 설탕과 프림의 뒤섞인 것들이 할아버지의 커피를 마무리 지었다.


이렇게 단 커피에는, 꼭 가볍지 않은 할아버지와의 토론이 필요했다. 할아버지는 내게 책들을 추천해 주셨고, 커피 한 잔과 함께 그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쉽지만은 않은 자리였다. 할아버지와 티타임이 있기 전날에는, 낡디낡은 세계 전집을 꼭 읽어야만 했으니까. 잘 관리되어 종이는 여전히 빳빳했지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 노랗게 변한 책 - 그런 책을 읽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새로 나온 개정본 보다 이 책들이 원작의 느낌을 더 잘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여하튼, 그래서 나는 그렇게 낡은 책들을 꼭 읽어야 했다. 할아버지와의 커피 시간을 선물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자가 있다. 스티브 잡스를 완성하는 것이 게스 청바지와 검은색 폴라티 었다면 할아버지를 완성하는 것은 모자었다. 모자의 종류도 가리지 않으셨다. 겨울에는 베레모와 두툼한 벨벳 소재의 중절모를 쓰시고, 여름에는 리넨 소재의 헌팅캡과 파나마 햇을 쓰셨다. 집 밖 마실을 나갈 때도, 허투루 입는 법이 없으신 분이었지만 그를 완성시키는 것은 역시나 모자었다. 빳빳한 모시 재질의 셔츠에 리넨 소재 모자는 그의 품위를 지켜 주었다. 그렇게 그는 언제나 멋을 아는 신사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할아버지의 팔순 잔치로 돌아온다. 할아버지의 연세가 있어, 더 이상 파이프 담배는 권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커피와 독후감은 서른을 앞둔 손녀가 드리기엔 조금 부족한 선물 같았다. 결국 후보지는 하나로 좁혀졌다. 모자. 요즘 같은 장마철에 제격인, 넓은 챙의 하얀 파나마 햇이면 될 것 같다.


온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할아버지의 선물 오픈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웬걸, 가족 모두가 할아버지 생신 선물로 모자를 준비한 것이 아닌가. 나만 알고 있는 비기라고 생각했는데, 가족 모두 할아버지의 선물을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가장 할아버지답게 하는 선물을 다들 알고 있던 것이다.

항상 그는 그만의 색이 뚜렷한 분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유독 그날, 할아버지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들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좋아하는 문학가에 심취한 채, 사색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하는 파이프.

족들과 그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

팔순의 나이에 모든 것을 내려 논 때에도 그의 품위를 지켜줄 수 있는 무언가.


할아버지의 선물 리스트는 할아버지가 받고 싶은 선물의 목록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니 우리 가족 모두가 기억하는 –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답게 만들어주는 것들이었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엄마랑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할아버지는 취향이 참 확고한 분 같다고 얘기했다. 또 본인의 색이 참 뚜렷하신 분 같다고도 얘기했다. 그런 내게 엄마는 의외의 답을 했다.


사실 할아버지의 취향을 알게 된 것은 엄마도 오래되지 않았다고. 환갑이 넘은 후에 글을 쓰시면서 엄마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았던 것 같다고. 그리고 할아버지가 팔순이 될 때까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답게 하는 것들에 대해 안 지 엄마도 채 10년이 안된 듯하다고.


그럼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뭐인 것 같냐는 내 질문에, 엄마는 ‘초콜릿’이라고 했다. 답변이 별로 맘에 안 드는 것을 보니, 초콜릿은 분명 답이 아닌가 보다. 그런데 또 그럴싸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아직 뚜렷하지 않나 보다.


어쩌면 나의 색을 이루는 것도, 한참 시간이 지나야 찾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커피잔의 프림처럼, 커피를 다 마신 후에 찾아오는 씁쓸한 단맛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경험, 저런 경험 겪은 후에야 비로소 단어와 문장으로 응축되는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한 오십년 쯤 지난 후에, 내가 할머니가 된 그런 때에. 내 손주들도 '나만의 선물리스트'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 할머니~" 하고 운을 띄우면, 언제나 스쳐 지나가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있을까. 




오늘도 귀여운 하루를 보냈다

https://brunch.co.kr/magazine/lovelydaytoday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행복했나요? 아니면 고된 하루 었나요.

저의 하루는 '행복하다', '고되다', '멋지다' 등의 형용사로는 정의하기가 힘듭니다.  

딱히 슬프거나, 화난 하루는 아니지만 엄청 행복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멋진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 그럴싸한 날들을 보내고 있지도 않고요.

대신에 저는 조금 '귀엽게' 보낸 것 같긴 합니다.   

별 것 아닌 사소한 순간에서 감동을 받기도 하고요,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서 작은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도 귀여운 하루를 보냈다>는 일상의 사소하지만 귀여운 깨달음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여러분의 매일도, 귀여운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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