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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01. 2019

27. 나라밖에서 만난 한국의 자화상_모스타르,보스니아

흙수저 공화국에서 나를 드러낸다는 것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이슬람 가정의 실내 풍경, 카이타즈 하우스, 모스타르,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유감스러운 점은 한국인의 성사율이 가장 낮다는 것이었다. 한국 숲의 위기에서 촉발된 프로젝트인데 외국인들 대다수는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하며 촬영에 응한 반면 당사자인 한국인들은 나 몰라라 하는 형국이었다. 빠르면 5분 안에 마무리할 수 있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참여자가 자필 메시지를 적어서 들고 있으면 그 모습을 내가 촬영하는 게 작업 과정의 전부였다. 장시간을 들여 심도 깊게 작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순발력을 발휘해 신속하게 촬영하는 사례도 많았다. 얼마든지 가볍게 작업할 수 있음에도 참여를 청한 한국 여행자들 중 절반만이 호응했다. 거절할 만한 명확한 이유도 없었다. 은근슬쩍 뒤로 빼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외국 친구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던 장면들이 떠올라 씁쓸한 기분이 들곤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러했지만 그 배경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내 앞가림만 하기에도 벅찬 흙수저 공화국에서 역동적으로 표현하면서 살기가 쉬울 리 없었다. 헬조선이라는 말로 자조해야 할 만큼 절망적인 환경에서는 마음이 원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법. 가파른 물질적 성장으로 인해 욕구는 극도로 팽창한 반면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 격차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이 날로 증폭되는 대한민국이었다. 가부장적 윤리와 체면을 중시하는 습속, 사회 전반에 팽배한 갑질과 혐오 문제까지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사회 환경 속에서 공공의 존재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려면 최소한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해 준 한국 여행자들이 오히려 비정상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나라 참여자의 성사율이 절반의 기로에 서 있던 지점. 우연히 한국인 여행자 유순재 군과 인연이 닿았다. 크로아티아의 소문난 해변 도시 스플리트였다. 호스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차려 먹기 위해 주방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와 마주쳤다. 한국 여행자들을 숙소로 초대해 요리 파티를 벌이고 있던 그의 권유로 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다. 요리는 두 사람이 주도했는데 한 사람은 현직 요리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음식점 주인의 자제였다. 소문난 해양 도시답게 식탁에는 새우, 오징어 등의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해산물이 잔뜩 등장했다. 배낭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를 식재료들인데 그것도 모자라 전문가의 손길까지 닿았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여행자의 만찬인 셈이었다. 화목한 대화까지 곁들이며 흡족한 시간을 보냈다. 


해안 산책로, 스플리트, 크로아티아


다음날 아침, 순재 군과 함께 아침을 차려 먹은 후 커피 한잔의 여유를 누리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갈매기들이 힘찬 날갯짓으로 허공에 무늬를 그리는 항구 주변으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감돌았다. 그 사이로는 현지인들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걸어 다녔다. 햇살이 잘 드는 바닷가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은 후 커피를 주문했다. 곧이어 빛깔 좋은 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학군단 생활 후 장교로 군에 입대한 순재 군은 복무 활동을 얼마 전 마무리 지은 상태였다. 전역 직후이니 마초 근성이나 위계 감각이 드러날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재치 있는 언변을 슬금슬금 뽐내곤 했다. 


바닷가의 노천카페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변함없었다. 그래서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친구여서 프로젝트에 참여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명을 전해 들은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을 떠나오면서 크로아티아의 바닷가에서 한국의 사회 문제를 주제로 한 사진 촬영을 제안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었다. 전역 직후이니 현실 감각도 미처 회복이 안 되었을 텐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행자가 난데없이 숲을 보호하자고 하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을 게다.  


시간이 흐를수록 순재 군의 마음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선뜻 결정은 내리지 못했다. 그가 탑승하기로 예정된 버스의 출발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카페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순재 군이 나를 향해 말했다. “다음 목적지에 도착해서 참여 여부를 결정한 후, 혹시 참여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면 사진을 셀카로 찍어서 보내도 될까요?” 그러라고 했다. 종이 한 장을 건네받은 그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버스에 올랐다. 긍정과 부정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듯한 인상. 기다려 보기로 했다. 


지역 최고의 명물인 올드 브릿지(Stari Most), 모스타르,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그날 저녁 결과를 전해 줄 듯했던 순재 군은 얼마간 소식이 없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래도 반타작은 한 상황이었는데 성사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며칠째 소식이 없어 마음을 비울 무렵, 순재 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필 메시지를 들고 찍은 셀카 사진과 함께였다. 내가 머물고 있는 모스타르에 다음날 도착할 예정이니 만나서 사진을 새로 찍어달라기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답신 전송 버튼을 누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튿날 저녁,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순재 군을 마주쳤다. 저녁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어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제 막 모스타르에 도착했다는 설명이었다. 그의 곁에는 두 명의 동행인이 더 있었다. 스플리트의 해산물 파티를 주도했던 두 요리사였다. 셋이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차를 렌트해 국경을 건너왔고, 모스타르를 구경한 후 몬테네그로로 넘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인근 식당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했고, 다시 그들의 숙소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눴다.


크라비체 폭포, 메주고레,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촬영은 다음날 아침에 했다. 스플리트에서 발군의 요리 솜씨를 뽐냈던 현직 요리사 김유미 양이 자신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밤새 마음을 가다듬은 후 이튿날 아침에 촬영을 했으면 좋겠다기에 그러자고 했다. 유미 양은 다부진 성향의 소유자였다. 단아한 인상에 해맑은 미소를 지녔지만 강단이 분명했다. 사회 참여에도 관심이 많고, 자신의 직업인 요리에 대해서도 애정과 자부심이 충만했다. 자신만의 철학을 담은 요리를 내놓고자 하는 열망이 자주 엿보였는데 사진을 포함해 문화예술을 상당히 애호한다고 하니 탐구심을 꾸준히 이어간다면 훗날 요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도 있을 듯했다. 의상 역시 촬영을 위해 신중하게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촬영에도 집중력 있게 임했다.  


모스타르는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공인받고 있었다. 기독교 일색인 주변국들 사이에서 이슬람 문화를 우뚝 융기시킨 모습도 이채로웠거니와 그 일대의 자연환경도 감탄을 자아낼 만큼 근사했다. 역사의 풍화로 인해 한껏 빈티지해진 거리로 종교색을 잔뜩 풍기며 걸어 다니는 지역민들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모스타르에는 미덕의 풍경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도시 전역에 남아 있는 내전의 상처가 발걸음마다 마음을 건드려 왔다. 폭격으로 인해 폐허가 된 건물의 외벽부터 부서진 창틀 안으로 보이는 무성한 덤불에 이르기까지 지역 곳곳에서 마주치는 참혹한 역사의 잔해들이 비극적인 안색을 드러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에 손을 얹게 만드는 모스타르에서 여행의 환상에만 흠뻑 젖어 있는 여행자는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두 사람이 자필 메시지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상처 깊은 현지의 풍경들에 두 사람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전했으면 해서 촬영 장소는 폐허 앞을 선택했다. 안타까이 찢긴 피부 너머로 늑골마저 무너져 내린 건물들 안에서는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뼈아픈 흔적들 사이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두 사람의 정성이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모스타르에 의미 있게 스며들기를 기원하며 셔터를 눌렀다.


전쟁 당시의 폭격으로 인해 폐허가 된 건물, 모스타르,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69th 퍼포머

: 유순재


- 국적: 대한민국

- 촬영지: 모스타르,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촬영 당일, 나는 이른 시각에 출발하는 근교 투어를 신청해 둔 상태였고, 두 사람은 낮 시간 중에 몬테네그로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전에 작업을 해야 했는데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순재 군과 유미 양이 내 스케줄에 맞춰 이른 아침부터 촬영에 임해 주었다. 만반의 준비 상태로 나를 맞이한 두 사람과 함께 주변의 폐허 앞에서 작업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부로 진입해 촬영하고 싶었지만 입구가 가로막혀 있어 아쉬운 대로 그 앞에서 셔터를 눌렀다. 왼쪽 사진이 그날의 작업물이다. 오른쪽 사진은 순재 군이 모스타르로 넘어오기 전 머물렀던 도시에서 스스로 찍어 보내 준 셀카다. 


70th 퍼포머

: 김유미


- 국적: 대한민국

- 촬영지: 모스타르,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스플리트에서 파티를 벌이던 당시, 요리를 책임진 두 명의 셰프 중 하나가 유미 양이다. 행복한 표정으로 요리에 임하던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본인 스스로도 요리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 듯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유미 양은 다시 셰프의 세계로 복귀했다. 새 직장은 서울의 한 서양 음식점. 일 자체는 만족스러워하는 듯 보였으나 근로 조건이 좋지 않은 듯했다. 일일 근로 시간은 적정 수준을 한참 초과하면서 휴일은 지나치게 적은 근무 환경이 그녀를 쉬이 지치게 할 것 같아 안쓰러웠다. 사회 전반에서 근로 조건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바꿔야 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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