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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25. 2019

47. 도난 사고와 바꾼 우정_이스탄불, 터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남자, 동양 사상을 탐독하는 여자

바체코이 미르케즈, 이스탄불, 터키




마음만 비우면 도난 사고의 국면을 순조롭게 지나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 하나의 난제가 길을 가로막았다. 도난 확인서 발급이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발급받았는데 터키에서는 쉽지가 않았다. 경찰이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이유였다. 통역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으나 현지에서 친구를 사귈 새도 없이 사고가 터져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숙소 근처에서 카우치서핑 정기 모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현지 카우치서퍼들에게 도움을 청해볼 요량으로 모임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기 모임이 한창인 서양식 펍에는 꽤 많은 이들이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참석자들과 하나둘씩 인사를 나누며 도움을 청할 만한 인물이 있는지 살폈지만 떠들썩한 분위기 때문에 마음을 맞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에라이라는 현지 카우치서퍼와 말문을 트게 되었다. 다소 소란스러운 흐름 속에서도 단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에 도난 사고 소식을 들려주었다. 내 얘기를 들은 에라이는 “에라이, 나쁜 놈들!” 하고 내뱉으면서 경찰서행에 동행해 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약속 당일,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꽤 질척거리는 날씨. 전날 에라이와 깊은 대화를 나눴던 것도 아니어서 혹시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나 염려했는데 고맙게도 에라이는 약속 시간에 맞춰 나와 주었다. 곧바로 경찰서에 가서 도난 확인서를 발급받았다. 혼자였으면 장시간을 허우적거렸을 상황인 데다가 궂은 날씨를 마다하지 않고 나를 돕겠다고 나와주기까지 해 고마운 마음이 컸다. 해서 경찰서 인근의 식당에서 에라이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보스포루스 해협, 이스탄불, 터키


에라이의 도움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마음씨 좋은 그의 배려로 그의 집에서 카우치서핑도 했다. 도난 확인서 발급을 도와준 것만도 고마운데 잠자리까지 제공해 주기에 그동안 축적한 여행 경험들 중 최고의 것만을 골라서 에라이에게 전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세계 여행이 꿈인 에라이였으나 아직 해외 경험이 없었다.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본격적인 소통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여행 노하우나 여행 정보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잔기술에 불과한 데다가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여행 정보는 상황이 바뀌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때문에 대화의 초점을 여행의 태도와 의미에 맞췄다. 에라이가 여행을 통해 성큼성큼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간의 경험과 깨달음을 에라이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요 몇 년 동안 꽤 진지한 자세로 여행을 탐구해 왔다. 관심을 보이는 여행자들에게 그 결과를 공유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했다. 그렇지만 워낙 깊고 방대한 화두라 한국어로도 쉽게 풀어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에라이와의 대화에서 사용해야 하는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아직 해외여행을 경험하지 못한 에라이에게 모든 내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에라이는 내가 화두를 던지는 족족 진공청소기처럼 흡수했다. 책장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꽂아 둔 에라이였다. 깊은 이해가 요구되는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의 명저를 읽고 있기도 했다. 여행을 사이에 둔 대화는 끝없이 매끄러웠다.  


에라이는 재능 있는 음악인이기도 했다. 주 포지션은 드럼인데 최근에는 베이스 기타를 연습 중이었다. 기타도 잘 쳤는데 한가한 시간에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스팅의 'Shape of my heart', 메탈리카의 'Nothing else matters', 딥 퍼플의 'Smoke on the water', 뮤즈의 'Histeria',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Californication' 등을 훌륭히 연주했다. 가끔 내가 그의 연주에 노래를 입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잘 불지도 못하는 하모니카를 꺼내 즉흥 잼도 했다. 미숙한 솜씨로 덤벼들긴 했지만 감성적인 궁합은 아주 잘 맞았다. 나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는데 에라이는 나보다 더 흡족해했다. 


원래는 에라이네 집에서 하룻밤만 묵을 예정이었다. 이튿날부터 프랑스 여행자 두 명이 에라이네 집에서 묵기로 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 동안 나와 시간을 보낸 에라이가 마음을 바꿨다. 친구가 맡겨 둔 여분의 매트리스가 있어서 넷이서 함께 지낼 수 있을 것 같단다. 저녁이 되어 에라이와 함께 이스탄불 밤 문화의 심장인 탁심 광장으로 프랑스 여행자들을 마중 나갔다. 주소를 알려 주고 알아서 찾아오라고 해도 되는데 자상한 에라이는 마중을 선택했다.  


세이렌테페, 이스탄불, 터키


이스탄불 전역에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행인들에게는 더없이 낭만적인 풍경일 테지만 버스로 이스탄불에 진입하고 있던 그녀들에게는 커다란 난관일 것이었다. 도로 위에서 발이 묶인 그들은 약속 시간보다 서너 시간을 넘겨서야 탁심 광장에 발을 들였다.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카페와 바를 꽤 긴 시간 동안 전전해야 했다. 막상 약속 장소에 나가서 보니 여성 한 명만이 보였다. 함께 여행하던 친구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중간 어느 도시에서 계속 머무르기로 했단다. 우리가 맞이한 새 인연은 프랑스 리옹에서 온 21세의 여행자 레아였다. 이후 세계 3대 종교국 여행자들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에라이가 이슬람교를, 레아가 기독교를, 내가 불교를 대표했으나 셋 다 종교는 없었다. 


이튿날 에라이가 꼭 보여 주고 싶은 숲 지대가 있다기에 셋이서 함께 길을 나섰다. 전날에도 도시 전역을 뒤덮었던 눈은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에도 계속 내렸다. 숲 지대에 도착해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치며 새하얀 겨울 왕국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손을 호호 불며 숲 지대를 누볐고, 흰 눈이 담요처럼 덮인 호숫가에서 여유 시간도 즐겼다. 에라이는 푹신한 눈밭에 큰대자로 몸을 던져 드러누우며 성장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했고, 요가인인 레아는 호수를 바라보며 스트레칭으로 몸을 이완시켰다. 장시간을 추위에 시달린 나머지 관리소로 불쑥 찾아들어가 난로를 한참 쬐기도 했다. 오고 가는 길은 험했지만 천지가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풍경을 만끽하는 즐거움은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에라이의 제안으로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히치하이킹도 했다. 오전보다 더 많이 쌓인 눈길을 헤치고 돌아오는 길이 낮보다 더 새하얬다. 


레아가 합류했을 당시 나와 에라이 사이의 대화는 상당히 깊어진 상태였다. 우리가 주고받는 화두에 관심이 없다면 레아는 스며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레아는 아무런 버퍼링 없이 우리 사이로 파고 들어왔다.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그녀는 서양 사상에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동양 사상을 탐독해 오고 있었다. 사회 참여에도 관심이 많았고, 소신을 실천으로도 옮기고 있었다. 레아의 합류로 대화의 화두가 더욱 풍성해졌다. 동양 사상을 두고 레아와 치열한 논쟁도 했다. 레아는 그동안 자신이 접하고 이해한 내용들을 소란스럽게 주장하는 대신 내가 하는 얘기를 주의 깊게 들었고, 나는 그녀가 의견을 꺼낼 때마다 발언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경청했다. 동양 사상뿐만 아니라 여행과 삶, 정치와 사회, 예술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두에 걸쳐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물론 에라이도 함께였다. 


셋이서 같이 음식도 만들어 먹었다. 에라이는 버섯 요리를, 레아는 감자 요리와 호박 요리를, 나는 부침개를 만들었다. 거기에 와인을 곁들였다. 푸짐한 식탁 위로 화목한 기운이 봄날처럼 감돌았다. 셋이서 즉흥 잼도 했다. 초보 연주자인 레아에게 에라이가 간단하게 베이스 라인을 만들어 가르쳐 주었고, 레아가 연습하는 틈을 타 에라이는 기타를, 나는 하모니카를 레아의 베이스 라인 위에 슬그머니 얹었다. 감성적으로 아주 훌륭한 합이었다. 


베이스 라인을 만들고 있는 에라이, 이스탄불, 터키


레아가 떠나던 날에도 눈은 계속 내렸다. 기록적인 폭설의 나날들. 레아가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에라이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눈도 이렇게 잔뜩 오는데 레아가 이스탄불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우리가 공항까지 바래다줘야 하지 않을까?”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에라이를 향해 고개를 끄떡였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광판부터 살폈다. 다행히도 레아의 항공편에는 이상이 없었다. 이제 작별 포옹을 나눌 시간. 아르헨티나를 여행할 당시 현지에서 일하는 심리 상담사에게 깊은 포옹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상대의 상태를 포옹을 통해 감별할 수 있게 되었다. 대개의 경우, 호의의 정도와 상관없이 근육이 경직되어 있거나 얼마간의 정서적 저항이 있는데 레아에게서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흔치 않은 다정함과 유연함이 있었다. 아집이나 편견 없이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상태인 듯했다. 포옹이 아주 길게 이어졌다. 이례적으로 길고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작별 인사를 마친 레아는 우리에게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출국 게이트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다시 에라이와 나 둘만 남았다. 공항을 빠져나오는 길에 에라이가 말했다. “카우치서핑은 언제나 근사한 시간을 선사하지만 게스트를 보내는 순간은 그 반대란 말이지. 섭섭한 기분이 밀려오는 이 순간이 싫어.” 나에게도 레아는 멋진 친구였지만 에라이에게도 훌륭한 동갑내기 벗이었다. 맑고 깨끗한 영혼을 지닌 레아였기에 이별의 아쉬움은 더욱 깊었다. 도난 사고로 인해 심신을 많이 혹사한 상태였는데 포근한 성품의 레아와 호의로 무장한 에라이 덕분에 아름다운 시간을 다시 한번 누릴 수 있었다. 돌아보면 사고를 겪지 않았다면 맞닿을 수 없는 우정이었다. 불행은 삶의 작은 편린에 불과할 뿐, 그 끝에는 다시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 덕분에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깊은 우정을 건네 준 두 사람과의 시간을 뜻깊게 추억할 듯했다.


개들이 자석처럼 따라붙던 레아, 이스탄불, 터키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111th 퍼포머

: Eray Ozden


- 국적: 터키

- 촬영지: 이스탄불, 터키


해외여행을 소망하고 있었으나 외국으로 출타한 경험은 없었던 에라이. 어학 연수나 그에 준한 경험도 없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영어 솜씨는 상당히 좋았다. 독학이 그 비결이었다. 구사하는 문장이나 발음으로 미루어 언어 감각이 남다른 듯했다. 그랬던 에라이가 드디어 외국 땅을 밟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벨기에, 독일 등의 서유럽 국가들과 쿠바, 멕시코 등의 중미를 여행한 듯했다. 지금은 이스탄불의 한 헤어 클리닉 센터에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과도한 상업화 때문인지 최근 SNS 서비스를 탈퇴했는데 연락하기가 답답해지긴 했지만 강단 있는 모습은 근사해 보였다.



112th 퍼포머

: Lea Delalee


- 국적: 프랑스

- 촬영지: 이스탄불, 터키


레아도 인문학적 소양은 에라이에 못지않았다. 다양한 화두에 걸쳐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동양 사상에도 관심이 깊은 레아이기에 유가와 도가 중 어느 쪽이 더 기품이 있는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레아는 유가를 옹호했고, 나는 도가를 옹호했는데 동양 사상을 두고 꼼꼼하게 논리를 펴는 외국 친구를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에라이와 함께 배웅 나간 공항에서 우리와 작별 포옹을 마친 레아는 폭설이 내리고 있던 이스탄불의 날씨를 염려하며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나에게 벗어주었다. 여행의 남은 순간은 물론 한국에서도 장갑을 소중히 사용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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