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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직원 Dec 07. 2020

케이프 코드의 아침

장(掌)편 소설 #.1


<케이프 코드의 아침>


“케이프 코드”의 아침이 인쇄된 포스터는 발색이 아쉬웠다. <빛 혹은 그림자>,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아니 이미 충분히 영감을 받아 온 작가들의 16편의 단편을 모은 책. 기획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내가 거래하지 않는 인터넷 서점에서만 사은품으로 주는 드로잉 노트가 궁금하긴 했지만, 어느 인터넷 서점이든 표지에 앉혀 놓은 “케이프 코드의 아침”의 포스터를 준다 길래 주저 없이 단골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책은 포스터와 함께 이튿날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나의 관심을 먼저 사로잡은 것은 발색이 아쉬운 그 포스터였다. 사실 포스터라고 하기엔 사이즈가 애매했다. 벽에 붙여 놓기엔 디테일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사이즈였다. 나는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 서재위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딱 폭이 70센티 미터쯤 되는 책상의 안쪽 벽, 의자에 앉아서 배를 책상에 딱 붙이고 앉으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유화라고 하지만 포스터의 질감상 특유의 터치 감이나 발색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애매한 발색과 포스터의 밋밋한 질감 덕에 그림의 정조(情調)가 제대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외려 이 그림은 이 포스터를 위해 그려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배를 책상에 포개고 자연광에서 또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면밀하게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이튿 날의 새벽 녘이었다. 나는 잠에서 깨었다. 종종 거실 소파에서 무릎 담요를 덮고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나는 새벽에 요기(尿氣)를 잘 느끼는 편이 아니다. 게다가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경우는 숙면을 취하는 편이어서 새벽 녘에 잠에서 깨어난 것 자체가 이상했다. 더 이상한 것은 창문을 열어 놓고 잤을 때 느껴지는 새벽의 써늘함과는 다른 사뭇 스산함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창문은 경첩까지 걸어 잠궜지만, 마치 창문이 열린 것과 같은 차가움이었다. 잠을 깨울 정도의 한기마저 느껴졌다. 아니 한기라기 보단 요기(妖氣)에 가까운 차가움이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서너 차례 흔들었고 두 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차가움의 정체를 파악해야 할 것 같았지만 선뜻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 느껴지는 차가움이어서였다. 주저할 수 밖에 없는 어떤 느낌. 하지만 별 수 없이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팔짱을 끼듯 양팔을 교차해서 삼두근 위아래를 주무르며 차가움의 근원 쪽으로 걸어갔다. 긴장도 되었고 실제로도 쌀쌀했기 때문이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서재였다. 서재로 조심스레 향했고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면 문이 활짝 열렸을 터인데, 서재 쪽에서 감지되는 한기는 바람과 같은 물리적 형태가 아닌 일종의 분위기였다. 나는 조심스레 조금 열려져 있는 문을 열었다. 작은 공간이었으므로 바로 사태가 파악되었다. 내 눈앞에는 한 여자가 서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케이프 코드의 아침”에서 본 여인의 뒷 모습이 딱 저렇게 생겼지 싶었는데, 실제로도 막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나는 신비롭다는 생각을 했는데 새벽 미명의 어슴푸레함이 신비스러움을 자아내는 것인지 아니면 아니면 실제로 신비로운 존재인지 헛갈렸다.


그는 창을 연 채로 나에게 뒷 모습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림과는 달리 아파트 창문은 사이즈가 작은 여닫이였지만 이미 활짝 열린 상태였고 그 곳을 통해 가을 새벽의 찬 기운이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가을의 한기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존재였다. 낡았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선홍색의 원피스를 입은 그는 160센티 미터쯤 되어 보였고 분명 꼿꼿하고 젊어 보였지만 뒷 모습만으로는 나이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마치 디지털 카메라에 있는 한 가지 색상만 강조하는 필터를 쓴 것처럼 원피스의 선홍색이 도드라져 보였는데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원피스가 지닌 색의 생명력 덕분이었다.


열린 창문의 한기 탓인지, 아니면 그림에서 튀어나온 인물이 바로 눈 앞에 있어서 였는지 그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그 나마 내가 그림에서 튀어나온 사람이 눈 앞에 두고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얼마전에 내가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완독한 덕분이었다. 물론 내가 지닌 그림은 호퍼의 원본도 아니었고 숨겨진 명작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그저 사이즈가 애매한 색감이 명확하지 않은 포스터일 뿐이었다. 여하튼 하루키의 작품은 그림에서 사람이, 아니 어떤 개념이 물성과 인격성을 지닌 존재로서 튀어나올 수 있다는 문학적 사실을 알려주었고, 적어도 지금 나의 눈 앞에는 그림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서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몸을 돌렸고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이 곳은 창문이 무척 작군요."


"네 그럴 수 밖에요, 여기는 한국의 아파트거든요. 그나저나 한국어를 할 줄 하시는군요?"


그가 답했다.


"나는 회화적 실체라기 보다는 문학적 영감이니까요. 나의 존재 자체가 번역되었다고 하면 어떨까요?" 


"하긴 포스터에서 사람이 튀어나온 상황인데요. 그림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한국어를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긴 하네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당황한 마음을 감춘 채 말을 꺼냈다. 사실은 당황 했다기 보다 언젠가 이런 일이 한번쯤을 일어날 수도 있을 거란 별스러운 예감 따위가 있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고 해서 침착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 특별한 문학적 사건이 내게 벌어질 수 있다는 막연하지만,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확신을 품고 있었다. 그 일이 오늘 이 새벽녘에 벌어졌고 하루키의 책을 얼마 전에 읽었을 뿐이었다.


"당신의 이름은 '조(Joe)'이지요? 조세핀 호퍼."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의 존재는 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나는 지금 에드의 모델이나 뮤즈로서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지금 문학적 영감으로 존재해요. 당신이 조라고 부르고 싶다면 조라고 불러도 좋아요."


문학적 영감, 조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곧 사라지겠군요. 영감이란 존재는 찰나의 존재잖아요?"


"잘 알고 있군요. 그래요 나는 곧 사라지겠죠. 발색이 아쉬운 저 대량 인쇄된 그림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영감이라면 아주 단편적이고 짧을 수 밖에요. 그래도 이렇게 조우하고 있잖아요?"


조는 그러면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얼굴로 웃어 보였다. 나는 따라 웃고 싶었지만 이내 약간 슬퍼졌다. 고작 그림에서 사람이 튀어나온, 엄밀하게 말하면 문학적 영감이 튀어나온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조는 곧 사라질 터이고, 이는 문학적 영감도 함께 사라질 터였다. 나는 항상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내가 이런 신비한 문학적 체험에 확신을 두고 있었던 이유에는 나의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내가 물었다. 나는 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조, 당신은 근원적인 영감인가요, 아니면 스쳐가는 영감인가요."


조는 미명만큼이나 엷은 웃음을 지닌 채 말했다.


"글쎄요, 내가 그 질문에 답을 해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근원적 영감이라고 해도 슬프고 순간의 지나가는 것이라고 해도 슬프겠군요. 영감은 잡을 수 없으니까. 에드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좀 알고 있나요? 에드는 내 작품 활동을 집요하게 방해했지요. 한편으로 나는 에드의 미술적 동기이지 영감이었고. 나의 예술적 영감은 사라지고 나는 에드의 영감으로만 존재했지요. 나는 영감이 사라진 존재이자 영감 그 자체, 판단은 당신이 해보세요."


조는 이 말을 남긴 채, 원래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조가 향하고 있던 동쪽으로 나 있는 창에는 햇살이 비추어오기 시작했다. 아침이었다. 빛을 머금은 대기가 마치 조의 원피스의 선홍색처럼 촉촉해졌다. 그는 빛으로 흩어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내 그림에서 튀어나온 존재에게 근원적인 영감이냐는 질문을 던지다니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감의 전부이던 일부이던 조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갑자기 어떤 확신을 품게 되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체험은 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었다. 어쩌면 새벽에 느낀 두려움은 사람이 그림에서 튀어나온 현상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감각. 그는 회화적 실체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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