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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직원 Nov 30. 2020

고통은 계량컵엔 담아낼 수 없다

1. 나의 우울의 시작점(4)


나의 우울의 시작은 어디일까? #.6


인간의 고통을 수치로 나타내는 일이 가능할까, 또는 온당할까? 고통은 절대 수치화할 수 없는데 고통이 인격적이라서 그렇다.


고통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한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경험은 철저히 개인적이어서 객관화하거나 게이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거다. 이 점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공감할 수 없게 만드는 맹점이다. 인격이 된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그저 체온을 나누거나 고통의 고독이라는 실존적 상황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정도다.(쓰고 보니 엄청 큰일이네)


최근에 나와 교회 중고등부, 대학부를 함께 다닌 오랜 (여자)친구들에게 큰 일이 있었다. 한 친구는 다리저림 증상이 있어서 병원을 찾았다가 골반에 악성종양 진단을 받았다. 심지어 하나의 종양이 더 발견되었는데 위치가 제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할 수도 있는 병이었고 그것보다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매우 위중한 상황이었다.


다른 친구는 남편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정기 건강검진 혈액 검사에 이상 소견이 있었다. 재검을 받았더니 백혈구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급성 혈액암이었다. 이쪽 역시 목숨이 위협받을 정도의 큰 병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친구는 모두 치유되었다. 국내 최고 의료진이 진단한 악성 종양은 수술 후 확인해보니 양성 종양이었다. 깊숙이 박혀 있어서 제거가 불가능하다던 종양 역시 안전히 제거 되었다. 친구는 다리에 뻐근함은 느끼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다른 친구의 남편 역시 항암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치솟던 백혈구 수치는 잡혔고 지금은 물론 정상이다.


나는 두 친구가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 불안과 외로움을 가늠하기 힘들다. 드라이아이스 같은 의사의 차가운 진단은 마음에 화상도, 동상도 입혔을 것이다. 고통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버려졌거나 버림받았다는 감각은 어땠을까? 그로기 상태의 상대에게 코너를 향해 밀어붙이는 라이트 바디샷은 간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힌다. 난 그 고통을 이해할 수도 없고 잘 알 수도 없다.


사실 내가 더 알 수 없는, 아니 혼란스런 이유엔 이들의 고통이 사라진 데에 기적이 게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담담하게 썼지만 이들의 병은 치명적이고 생명의 촛불이 타는 걸 재촉하는 정도가 아니라 초자체를 밟아 끌 정도 였다. 수술의 결과를 알 수 없고 치료의 예후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기적이라고 부르기에 모자름이 없는 결과였다. 의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치유.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둘은 모두 (여전히) 신실한 신앙인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자하는 친구들이다. (동의할 수 없는 구석도 않지만)진실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실기 위해 분투하는 인격자들이다. 분명 그들에게 닥친 고통 앞에서 울며 기도했을 것이고 그들은 울며 뿌린 눈물의 씨앗을 환희로 거두어 들였을 터. 친구들의 고통의 잘 해결되고 치유되어 매우 기쁘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누구나 이들과 같은 기적을 경험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 이들이 겪은 놀라운 일은 고통이 인격적이라는 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비숫한 진단을 받고 수술 중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항암 치료가 효과가 없어서 세상을 떠나는 환자들도 많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현실의 고통에서 신적 개입이라고 할 만한 치유를 경험한 이 친구들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건낼 수 있을까?(궁금하다)


고통의 문제는 정말이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고통으로 벗어나게 되는 루트도 전부 다르고 빠져나온 후 얻게 되는 경험치도 전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녹슨 못에 발가락을 찔리면 따끔한 소독약을 사용하고 밴드를 붙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마치 파상풍에라고 걸려 온몸과 신장에 부종이 생긴 것처럼 상상의 고통에 몸서리를 칠 수도 있다.


고통을 수치로 나타내려는 수작, 계량해내려는 시도는 전부 틀렸다. 고통 속에서 신비체험을 하거나 미물에 대한 공포증으로 비둘기를 보면 공황발작을 하는 사람이 있는 한 고통은 수치화할 수도 없고 수치화해선 안 된다.


이런 뻔한 이야길 쓰는 이유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다. 세상에 행복의 객관적인 조건이란 없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느끼고 생리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고통이라는 스트레스가 누적되거나 트리거가 되면 누구든 육체는 물론 정신에 병이 생길 수 있다. 멘탈이 유리니 쿠크다스니 하는 소린 부질 없을 뿐더러 또 다른 고통이다. 고통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측면에서는 인간 그 자체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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