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 말씀 중에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 나오는 우리를 친구라고 불렀다는 구절입니다. 지금 성경의 표현이 과거와 조금 달라진 것 같기는 하지만, 이제 우리를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도 말씀해 주십니다. 어렸을 때 성경을 접하면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친구라고 하니 가슴이 벅찼던 기억에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계획을 주님께서 전달해 주셨다는 것도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예수님 이전까지는 하느님이 계획하시고, 보여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계획도 모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따라갔고, 마지막에야 하느님의 계획을 선물처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느님의 계획을 예수님이 모두 알려주시고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또 하나 특별히 기억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 나온 사무엘의 대답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 사무엘상 3,10
어린 사무엘의 이야기는 신앙생활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항상 생각이 많은 저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제 생각을 내려놓고 듣는 것을 연습합니다. 잘 못하니까 연습을 합니다. 잠시라도 긴장하지 않으면 아직은 제 생각이 들어갑니다. 상대의 말을 판단하기 이전에 먼저 끝까지 성심껏 다 들어야 하는데, 중간에 제 생각이 끼어들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사무엘이 부럽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엘리에게 찾아갑니다. 처음에 아니라고 했으면 다음에는 아닌가 보다 할 수도 있고,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해서 세 번 네 번 불러야 마지못해 일어날 법도 한데, 사무엘은 매번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엘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인가 아버지의 책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시절에 교리신학원의 통신교리 수료 기념 선물로 다시 만났습니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도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신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바로 어린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세가 기도라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듣고 있습니다 하는 것 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대답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응답하시는데,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응답하신다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의 응답과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에서 이야기한 기도의 정의는 하느님과 저와의 관계뿐 아니라 저와 주변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께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라고 매달릴 때 과연 저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귀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내 말을 들어달라고 하는 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지도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내 이야기를 안 들어준다고 서운해하기 전에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사무엘이 하느님께 응답한 그 말씀 그대로, 하느님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끔은 듣기 불편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고 있습니다.